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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Log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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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of cthulhu 7th edition fanmade scenarioWritten by 퐁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멈춰있거나그리고 행복하게 죽고 싶습니다.
 
KPC 설석환 PC 차혜경
 
Date 2024.09.11
 
 
·· MUSIC ··prelude to tsunami▶ ❚❚ ━━━━⊙━━━━━━━─ 0:00
 
역시나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입니다.
 
새는 여전히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하늘에 떠있고,
 
구름도 제자리에 멈춰있으며 우리를 습격하려던 좀비 떼마져 멈춰있습니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모래시계의 모래도 변화 없이 그대로네요.
 
오늘로 세상이 멈춘지 1년하고도 3일,
 
당신도 석환도 이 이상 현상에 점점 익숙해져가는 중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눈을 쿡쿡 찌르는 밝은 햇빛에 잠이 깼습니다.
 
밖이 조용한 걸 보면 석환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합니다.
 
차혜경:(정오 정도의 시간에 멈춰진 세상. 뜨거운 햇빛은 계절과 시간이 상관 없이, 창문 위에 걸려 있었다. 필연적으로 잠을 자기 위해서는 몸을 뒤집은 채, 자야만 했다.)
아이고…. (그 때문에 잠만 자고 일어나면 허리의 미미한 통증을 느낀다.) 시간은 그대로라며. 왜 내 몸의 시간은 흐르는 것 같은데?
(언제나 하는 짧은 투정. 그리고 긴 침묵. 몸을 일으키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세상에 다시 눈 떠버린 것에 미미하게 불쾌해한다. 그건 허리 통증보다 더 큰 고통이라. 허리를 매만지던 손은 금방 보통의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나의 안락하지 못 한 보금자리를 둘러보면. 여전히 그대로인 모래시계.)
(혜경은 이번에는 그쪽을 향해 손을 뻗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고 또 흐르지 않기를 바라며, 그것을 뒤집는다.)
(그것이 하루의 첫 시작. 어쩐지 유독 늦잠을 많이 자는―아마도 그저 나보다 늦게 잠들 뿐일― 남자를 깨우기 위해서, 일어나 방문을 나선다.)
 
차혜경:일어나. 368일 째의 아침을 맞이해야지?
 
설석환:(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본디 잠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분명 잠든 상태는 아니었으나. 왜일까, 눈이 떠지지 않는 건. 어쩌면 뜨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잠에 들어있을 때는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되니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참 질릴 정도로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알면서도. 눈을 떠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새로운 하루로 이끄는 사람이 싫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쳐 올라 미간을 좁히며 눈을 뜬다. 익숙한 얼굴. 그 언젠가는 보고 있으면 실없는 웃음도 났던 것 같은데. 이쯤 되면 다 무슨 소용인가. 당장 일어나는 감정 하나도 다스리질 못하는데.) 꼭... 깨워야 해? 어차피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일어날 때까지 둬도 되잖아.
(서 있는 혜경을 그대로 지나쳐 나간다. 어느덧 익숙해진 타인의 집, 타인의 방. 빈 거실로 나가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모두 멈춰버린 시간이지만 굳이 또 확인하기 위해서.)
 
차혜경:….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깨 한 번을 치지 않았다. 등 뒤로 지나쳐가는 그에게 포커스를 맞춘 채 바라본다. 이 여자가 그에게 시선을 땐 순간은, 날 보고 있는 눈을 좀 치우라는 듯, 그가 베란다 문을 닫을 때였다.
그 바란다는 온전히 그만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런 암묵적인 약속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깐깐하기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차혜경은, 그가 자고 있던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차혜경:(그러니까…. 그런 태도, 딱 알 수 있는 마음. 결코 서운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차혜경은 그저 묵묵히 그걸 읽어냈음에도 흘려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혜경이 그런 감정은 마음에 고이 간직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둘은 설석환이란 사람의 말이고 감정이 지금으로서 한 없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나는 그를 이해하니까.)
 
설석환:(말없이 아래 멈춰 있는 좀비들을 세어본다. 저 멀리 하나부터 가까이에 있는 83 마리의 멈춰버린 것들을. 매일 같이 세었다. 할 일도 없었으며 무엇이든 집중할 것이 필요했으니까. 이미 똑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하여 썩어버린 몸뚱이에 박힌 구더기의 수까지도 외워버릴 만큼.)
(그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매일 새롭게 눈을 뜨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는 채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 속에 갇힌 아이가 있는데. 오로지 나만이 흘러간다. 이 멈춰버린 시간은 축복일까, 지옥일까.)
(영원히 멈춰버린 너를 두고 떠나는 시간보다 너와 함께 멈춘 시간이 나을까. 시간이 약이라는데, 약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이 벌 같다. 상념을 지우기 위해 나온 시간인데 줄지 않는 상념 속에 눈을 돌린다. 제가 자고 일어난 자리를 치우는 여자.)
(알고는 있다. 우리는 이제 서로밖에 없었고.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며. 의지하고 지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보다 약했으며, 같은 아픔을 겪었으며, 같은 시간을 걷고 있다는 걸. 근데 왜... 나는 자꾸 화가 나지.)
(베란다의 문을 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는 하지만 썩 되지 않았고, 그걸로 책을 잡지도 않을 테니까. 그저 늘 그랬을 표정을 하고 입을 연다.)
 
설석환:오늘은... 식량을 구하러 나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차혜경:벌써? 그건 일주일 전에 하지 않았나? …뭐, 토를 다는 건 아니고. 그런 거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이런 말 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긴 하니까.
그럼 지도를 가져올게. 잠깐 기다려 봐. (자리에서 일어난 혜경은 각종 물건이 놓인 서랍을 뒤져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시간이 멈췄어도. 우리의 시간은 기록으로 담겨져 있었다. 갔던 곳, 가지 않은 곳. 그런 정보만 체크되어 있는 손으로 만든 종이 지도.)
각자 어디로 가면 될까. 난 저번에 여기를 갔는데. 내 키로는 닿지 못한 물건도 좀 있어서. 당신이 가면 좋기도 하겠고...
(이런 업무적인 혹은 사무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울린다. 혜경은 아침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을 잊고, 오늘의 첫 인사를 당신의 업무 지시로 기억하기로 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설석환:(종이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저도 모르고 또 날선 목소리가 새어 나간다.) 아무리 시간이 멈췄다지만, 최소한 장소는 같아야 하는 게 맞잖아. 어떻게 매번 그렇게 안일하지? 내가 없을 때 갑자기 시간이 흐르면 살 능력은 있고?
 
차혜경:(지도 위를 떠다니던 손가락이 멈춘다.) 그래도 돼? 그러니까 나랑 같이 외근 나갈 거야?
(날카로운 눈매의 표독함이 서린 눈동자. 경찰청에서 종종 보이던 모습.) 두 경감이 한 조가 되는 건, 정말 오랜만이 될 거야.
 
설석환:...그럼 안 나가? 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당연한 문제다. 아무리 보기 싫더라도 그렇게 멀리서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야 차혜경마저 잃으면 그때는...)
두 경감... 경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짐이나 챙겨.
 
두 사람은 식량을 구하러 나가기 위해 짐을 챙깁니다.
 
물건은 세 가지 정도를 챙길 수 있습니다.
 
집 안에는 식량과 통신기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이 있습니다.
 
차혜경:…, 소용 없다는 말 하지 마. 당신이 안 챙기면 내가 챙길 거야. 이거.
(그리고 여전히 그 잡동사니 서랍에서 무언가 찾아 꺼낸다. 경찰 수첩이었다.)
(혜경이는 그리고 묵묵히 짐을 챙겼다. 내 경찰 수첩, 설석환의 경찰 수첩. 그리고….)
…. 오늘은 그래도 기분 좋은 날에 속하니까. 가져갈까. (찌그러진 담배 한 값.)
(그 세 가지를 챙기고. 식량을 가져오기 위한 큰 가방을 준비하면. 혜경이의 짐 꾸리기는 끝이 났다!)
 
설석환:(쓸모 없는 잡동사니. 혜경의 짐을 보고 한 감상은 딱 그거뿐이다. 경찰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도 지키지 못했는데. 그 무엇도 수호하지 못했는데. 이딴 거지 같은 상황에.)
(말을 뱉지 않은 이유는 그마저도 귀찮아서였다. 언쟁 같은 걸 하며 말을 섞을 기력도 없었으니까.)
(안일한 여자의 대신으로 무기로 쓸 망치 하나와 작은 휴대용 라디오를 챙긴다. 그리고 헤어 밴드 하나를 소중하게도 품 안에 넣었다. 고작 하나 남아버린 그 아이의 흔적이었다.)
(각자의 방에. 그리고 거실에 하나 놓여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멈춰있어 내려가지도 않는 시계였지만, 늘상 뒤집는 것은 시간이 흐르길 바라서인 걸까. 나도 모르겠다.)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차혜경:(두 사람 모두 물건을 고르는 것에 있어서 고민이 없었다. 각자 확고한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런 것처럼.)
그럼. 안전하게 아지트로 돌아오는 걸 목표로.
나가봅시다, 설석환 씨.
 
준비를 마친 석환과 당신을 집을 나섭니다.
 
현산에 돌아와 적당히 구한 아지트는 저층 복도식 아파트입니다.
 
너무 층고가 높아도 밖에서 대피할 때 맞지 않고,
 
너무 낮아도 옥상으로의 진입이 어려우니
 
최적의 장소로 판단할 만 했습니다.
 
우리는 아파트의 2층에 있는 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집 아래에는 좀비들이 득실거리는군요.
 
복도에 있던 좀비는 평소와 같은 시간이 멈춘 어느 날
 
석환이 홀로 나가 전부 치워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서서 멈춰있습니다.
 
설석환:...그래서 어디로 가자고?
 
차혜경:여기서 쭉 가다가,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천천히 걸음을 맞춘 상태로 나아가며 말한다.)
그러면 보이는 …분식집.
그 집, 무슨 이유인지. 식재료나 음식 같은 걸. 천장서랍에 넣어둬선……
 
그리고 분식집을 향해 걷던 그 때,
 
갑자기 당신의 옆에 있던 좀비 한마리가
 
꿈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이성 판정 ✷
 
차혜경:
SAN Roll
기준치: 23/11/4
굴림: 2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제 눈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오히려 당황스러움에 정신이 선명해진다.)
 
설석환:
SAN Roll
기준치: 27/13/5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에 움직임이 걸리면, 곧장 차혜경을 당겨 등 뒤로 숨긴다.)
 
차혜경:(좀비가 움직이는 일보다 그 행동에 더 놀란다.) 어머, 야!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살아서 움직인다니.
 
게다가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뺨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웁니다.
 
1년하고도 3일동안이나 멈춰있던 그 바람이요.
 
그리고 그 좀비 하나를 기점으로 주위에 있던 모든 좀비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끼긱- 끼긱-
 
고개를 몇번 돌리던 좀비들은 일제히 당신과 석환을 주목합니다.
 
✷ 이성 판정 ✷
 
설석환:
SAN Roll
기준치: 26/13/5
굴림: 99
판정결과: 대실패
 
차혜경:……….
우, 우리 퇴로는. (혀가 씹힌다.)
SAN Roll
기준치: 23/11/4
굴림: 75
판정결과: 실패
 
차혜경 이성 감소 -1
 
설석환 이성 감소 - 1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도망치도록 합시다.
 
✷ 민첩 판정 ✷
 
차혜경:(1년하고 3일 동안 멈춘 달리기 솜씨가 괜찮을까. 글쎄. 확신은 못 하겠다. 혜경이는 설석환의 어디든 일단 잡고, 달린다.)
민첩
기준치: 80/40/16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설석환: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6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제 팔을 대강 잡고 달리는 혜경의 손을 붙잡고는 일단 달린다. 어디든 당장 발길이 닿는 대로.)
 
주변의 좀비들은 멈춰있던 시간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을 잡기 위해 몰려듭니다.
 
매일 같이 세었던 그 83명의
 
아니 83마리의 좀비들이 몸을 달려듭니다.
 
이 지옥 같은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자면
 
어디선가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 이쪽으로 와!
이쪽으로 피하라고!!
 
차혜경:저기, 저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당신과 석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라는 듯 문을 활짝 열고 둘을 향해 소리치네요.
 
✷ 민첩 판정 ✷
 
차혜경:
민첩
기준치: 80/40/16
굴림: 1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설석환: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3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두 사람은 무사히 좀비에게 잡히지 않고 노인의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노인은 둘이 들어오자마자 문을 쾅 닫아버립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지더니 잠잠해집니다.
 
노인은 문 틈으로 한참 밖을 살펴보더니 이내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네요.
 
설석환:차혜경, 어디 다친 곳은?! (부여잡은 혜경의 손을 당기며 병적으로 이곳저곳을 살핀다.)
 
차혜경:(달리기를 하기 위한 규칙적인 숨을. 이제는 긴장을 놓기 위해서 길게 내뱉을 때였다.)
(손이 당겨지고 몸이 기운다. 넘어질 뻔한 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제 눈이 닿지 못 할 등 뒤따위를 열심히 살피는 설석환을 본다.)
괜, 괜찮으니까. 애초에 너보다 더 빨리 달렸거든? 그것들한테 할퀴어지거나 했다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지.
(그런 말을 하면서 눈은 노인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타이밍을 놓친 탓이다.)
 
이제보니 노인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허리까지 오는 단정하게 하나로 묶인 흰 머리에
 
턱을 다 덮고 있는 주렁주렁한 흰수염,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 볼캡을 쓰고 있습니다.
 
노인은 두 사람을 보며 손을 내밉니다.
 
악수를 하자는 것 같습니다.
 
설석환:(혜경이 손을 잡기 전 자신이 앞서 노인의 손을 잡는다. 도움은 도움이고, 노인을 믿을 수는 없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혜경:(이 사람이 이렇게 날쎈 사람이었나?)
(이번만큼은 그의 속을 감히 예측할 수 없고. 아니, 그와 지내는 내내 예측할 수 없던 혜경이는 그 옆으로 오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타이밍 좋게 생존자가 있음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데. 아직도 살아있습니까?)
 
노인: 저희 집입니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어요. 마침 제가 창문을 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차혜경:(그 미소에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준다. 속은 단순히 좋은 사람의 것은 아니긴 하지만.)
(집이라니? 좀비가 이 세상에 나타난 지도 몇 년은 되었는데. 아니…. 아니지. 우리가 살아온 1년 3일이란 시간은 제외하고 생각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 좀비 주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반인이?)
누굴, 기다리셨어요? 창문을 보고 있으셨다니.
 
노인: 아니요, 그저 오늘도 시간이 멈춰 있나 싶어서... (여전히 웃는 낯으로 혜경에게 부드러이 답한다.)
 
차혜경:…?
 
설석환:(노인이 혜경에게 접근이라도 할까 싶어서 두 사람 사이에 선다. 자신의 경계를 숨길 생각은 없다.)
계속 혼자 계셨습니까.
 
노인: 예에, 불행히도 혼자네요. (방긋 웃는다.) 그래서 더 여러분이 반갑습니다.
 
차혜경:(벽처럼 막아선 설석환이 지금 이 순간은 방해물이다. 차혜경은 옆으로 삐져나와서 조용하고 빠르게 말을 내뱉는다.)
아니, 아니, 아니. 지금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지, 석환 씨. 지금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잖아. 오늘도 시간이 멈춰 있나 싶어서라고.
………. 우리만 멈춘 게 아니었다고?
 
설석환:그게 뭐가 이상해? (옆으로 삐져나온 혜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더 말리지는 않는다. 노인 하나 쓰러뜨리는 게 뭐 어렵다고.)
그동안 본 거라고는 좀비 뿐이었는데. 사람 하나 더 움직였대도 이상할 거야 없지.
 
차혜경:………. 당신. 벌써 시간이 멈춰버린 첫 날을 잊어버린 거야? (어이 없다는 의미가 명백한 한숨을 푹 내쉰다. 그녀는 노인을 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시간이 멈춘 게 당연하다고 보세요?
난 이상하다고 봐! 우리가 이 밖을 돌아다니던 것도 처음이 아닌데. 그렇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마주쳤을 게 맞는데!
 
노인: 늙은이 생각이 중요한가요.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물론 이 상황은 당연하지 않죠. 이상하지만... 너무 흥분할 것도 아닌 것 같네요. 이 상황에서 누군들 쉽게 나설 수 있을지...
 
차혜경:아무도 내 감정에 동조를 안 해주네. (설석환과 노인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쭉 내밀고 있다. 그러다가 어른스럽게. 주둥이를 집어넣으며.)
…그래요. 흥분하지 않도록 노력하죠. 아무튼, 곤란하게 돼
곤란하게 됐네요. 일단 목숨을 (스윽, 목을 만진다.) 구하기는 했는데. ……우리 아지트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아서.
 
노인: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여기서 묵으시는 게 어떨까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제가 뭐라도 먹을 걸 좀 가져올 테니까.
 
노인은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이내 음식을 가져오겠다며 창고로 들어가버립니다.
 
차혜경:(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귀한 식량을... 이란 형식적인 말도 해보지 못 했다.)
저 사람 되게 날쎄다. 몸이.
(설석환이 안일하단 생각이 들 말이나 뒤늦게 내뱉기나 하지.)
 
설석환:너 조금 더 경계하는 게 어때?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굴어?
 
차혜경:(그를 바라보지 않고 말한다.) 나름대로 경계하고 있는데. 겉이 이래 보여도, 속은 아니거든.
 
설석환:겉부터 만만해 보이는데 네 속이 무슨 상관이야? 네가 마음을 단단하게 먹는다고 해서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경계하라고. 차혜경, 넌 너무 안일해.
 
차혜경:…. (그제서야 그를 바라본다.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설석환:(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는 정작 당신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반대편 어딘가를 향해 꽂힌 힘 없는 시선, 굳게 다문 입술. 평소와 다름 없는.)
 
차혜경:(나를 보지도 않고 하는 걱정은….)
(정말 상대방을 위한 걱정이 될 수 있을까. 차혜경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던 고개를 스리슬쩍 없던 일로 하듯 돌렸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말을 한다.)
내 얼굴도 보지 않으면서.
그러면서 만만한 지, 아닌 지, 아떻게 알아.
 
설석환:......꼭 봐야 아는 건가?
 
차혜경:……그건 아니지. 꼭, 반드시, 그런 건 아니긴 하지.
그래. 미안해. 안일하지 않게 조심할게.
이런 말이면 안심할 수 있어?
 
설석환:아니, 전혀. 그렇게 쉽게 수긍하고 따를 사람이야, 당신이?
 
차혜경:(양 손을 주먹쥐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당신이 날 믿어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내가!
 
설석환:몰라, 나도! 믿음은 주는 쪽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정답을 맡겨뒀어? 왜 자꾸 내게서 답을 찾으려고 해. 나는 당장 나 하나도 모르겠는데!
(곧 혜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도 잠시간의 응시 후 다시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다.)
 
차혜경:(이 죽일 놈의 성질이란. 설석환의 언행 때문에 불같이 속이 들끓는다. 더욱 주먹이나 꽉 쥐고, 이빨로 입술을 짓누르고, 눈에 힘을 바싹 준, 그런 모습. 그게 설석환이 잠시 담은 여자의 모습일 것이었다.)
잘 났어. 아주 잘났어…. 그래. 당신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왜 남까지 신경쓰려고 그래? 내가 아무리 당신에게 칭찬 받을 잘난 짓을 하더라도, 그걸 볼 여유 하나 없잖아.
 
설석환:당신이 뭘 했는데? 내 칭찬 따위 받아서 좋을 것도 없는데 그런 게 필요해? (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다.)
그래, 나는 나도 모르지. 그래서? 당신이 어디서 죽든말든 신경 쓰지 말까? 그걸 원해?
 
차혜경:(그런 말을 듣은 여자 쪽도. 눈을 가지고 싶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이처럼 굳이 주먹 쥔 손을 얼굴 위로 올릴 필요는 없었다. 눈물이, 눈물이, 쉽게 그렁그렁 맺히는 사람이었어서. 눈물이 현실을 왜곡시켰다.)
내가 언제… 그런 걸 원한다고 했어? 그 어떤 사람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내 얼굴도 봐주지 않냐는 말을 하겠냐고?
 
설석환:그럼, 내가 뭘 어쩔까. 뭘 바라는 거야, 나한테. (눈을 가린 건 잘 한 선택이었다. 우는 얼굴을 봤으면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차혜경의 눈물은 지긋지긋하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눈물 따위, 더는 약해질 게 남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과하고 싶었고, 저 여자도 힘들겠구나 위로하고 싶었고, 기대게 해주고 싶은데. 그럴 만한 몸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화가 난다. 내가 아픈 만큼 아픈 것 같지도 않은데. 눈물을 흘리는 게 밉다. 고운 말이 나가지 않는다.)
(그게 온전히 나의 탓이라는 걸 매우 잘 알아서. 혜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사실은 가장 잘 아는데. 이 옆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옳은 걸까.)
생각하기 싫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
 
차혜경:뭐, 보고서를 제출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챙겨온 것 중에는 팬은 없는데. 이것 참 큰 일이야.
(말투는 여전했다. 문장 사이에 밟으면 아프라는 듯 함정이 있는 말투.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여리고 힘이 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흐른다고. ………, 당신, 멈춰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이제 끝이야.
사실 나를 챙긴답시고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마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
 
설석환:......
(드디어 시간이 흐른다고. 당연히 맞이했어야 할 시간이 이제서야 흐른다고. 나는, 나는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1년이 넘도록 메마른 듯했던 눈가가 이제야 젖어 들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눈물일 리가 없다. 이건 그저 시간이다. 고이고 고여서 멈춰져 있던.)
(굳게 닫힌 입술이 진동하고 눈을 가린 손이 사정 없이 떨린다. 잇새로 흐느낌이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끅끅대며 올라오는 울음을 삼켜낸다.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차혜경:(울음 소리가 들리는 게 이상하지 않을 리 없다. 지금 자신만해도 멋대로 튀어나온 눈물을 어찌할 줄 모르고 뚝뚝 흘리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제 울음으로 착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대답이 없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왔다. 예민한 귀가 당신의 소리 죽인 울음을 알아차리고,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며.)
설석환…. 당신, 설마.
(울어?)
(그런 생각이 들자. 주먹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눈물을 다급하게 닦아냈다.)
 
설석환:(혜경의 목소리가 들리면 호흡이 거칠어지며 어깨가 들썩인다. 아니라고,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울긴 누가 우냐고.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막힌 목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언어를 잃은 슬픔만이 뱉어질 뿐이다. 울음보다는 목이 졸린 동물의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토한다.)
(어쩌면 그날부터 자신은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멈춰있던 모슨 순간이 다. 내가 저 좀비와 다를 게 뭐지. 식욕을 가지지 못한 좀비에 불과하다. 이 몸, 이 꼴로. 하루하루. 사람이라도 되는 것마냥. 살아가면서.)
 
차혜경:(짓이겨진 담배곽.)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좀비가 적었을 때, 모두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와중에 서울을 향해 꾸역꾸역 올라가는 우리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날짜외 사간 그리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각자의 가족을 데리고 오는 거야)
(그리고 나는 시연이의 운동화만 손에 쥐고서 예정된 날짜, 시간 그리고 장소에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남자는 담배곽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꼭 말로 들어야만 아는 건 아니었기에.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서울을 떠났다.)
 
차혜경:(당신의 우는 모습을 보니까. 당신은 내버리고, 나는 다시 주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담배곽이 떠오른다. 왤까. 왜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걸까. 가방만 괜히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게 말이다.
그걸 주었을 적에도. 그저 막연하게…. 이걸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주웠을 뿐인데. 나에게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거여야 할 텐데.)
………. 뭐야. 왜, 왜, 왜 울어. 울지 마. 당신이 울면. 나는 또 어떡하라고.
(눈물을 닦아낸 손은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다. 곧고 평평한 손바닥. 그것이 당신에게로 향한다. 당신에게로 향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소매 끝을 부여잡는다.)
이리 와.
 
설석환:(뭐가 두렵기라도 한지 고개만을 수차례 내젓는다.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차혜경:(1년하고서 3일. 그러한 시간 동안 당신이 내게 준 상처에 비해서 투정이나 어리광으로 보일 뿐인 행동이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그 품을 안는다. 안긴다. 안아준다. 붙잡는다.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안 돼. 거부권은, 당신에게 없어.
(고개를 몸에 파묻는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당신을 보지 않을게. 손, 내려도 돼.
 
설석환:(자신을 붙잡는 손길. 안아오는 체온. 품에 안긴 무게. 그 모든 것이 무너지기에 너무도 적합해서.)
차, 혜경. 윽, 혜경, 아. (막혔던 숨이 트이듯 혜경의 이름을 부른다. 눈을 가린 손은 여전하다. 손을 치울 힘조차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온몸이 슬픔에 휘감긴 채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손끝이 저리고 숨은 막히고 가슴은 답답해서. 제 속을 다 파내어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어서. 이 모든 걸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 아이를 어떻게 보내줄 수가 있지? 뒤늦게 떼어진 제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다.) 이 두 손에 담길 만큼 작았는데... 내 품에 꽉 차도록 크게 자랐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속에 차오른 수많은 말들이 결국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다. 한 문장을 뱉을 때마다 마음이 쥐어짜이는 듯해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결국 흐르기 시작한 시간만큼 야속하게도. 온몸이 눈물에 질식할 것만 같다.)
 
차혜경:(단 하나 빼고는 완성되지 못 한 문장 투성이다. 하지만 혜경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의 뒷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했지 않은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니까.
나도 알고 있다. 그 아이의 손이 얼마나 작은 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 아이가 내 허벅지 어디까지 오는 지. 그 키가 그만큼 작아서 자신을 부를 때면 얼마나 목이 꺾이고. 마주본 눈동자의 색이 얼마나 고아해서는. 마트를 함께 갔다가, 그 올망졸망한 눈이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이해하기에, 나는 울어줄 수 있었다. 나의 눈물이 아니라. 당신을 이해하면서 생긴 눈물로 울어줄 수 있었다. 훌쩍임이 배가 되었다.)
어떻게 나만 살아갈 수 있냐고, 세상 모든 것들에게, 따지고 싶어…….
 
설석환:(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그 말에. 그 무게에. 기울어지듯 혜경의 몸에 무너져 내린다. 그 말을 어떻게 입에 담을 수가 있는가.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는데. 보고 싶어할 자격도 없는데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리는 것조차 나의 죄인데.)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시 흘러가는 시간에 흘러갈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는 게 진짜일까, 혜경아. 너는 어떻게 서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닌데 말로 나오질 않는다. 혜경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나갈 때까지 간신히 숨을 내쉬며.)
(찬찬히 숨을 고르며 똑바로 몸을 세운다. 흐르는 눈물은 닦지 않았다. 멈출 방법을 몰랐으니까, 닦아도 별 의미는 없을 테다. 혜경과 떨어져 가만히 혜경을 응시하다가 입을 뗀다.) 미안해, 차혜경.
(떨리는 손을 뻗어 좀 전까지 닦아주지 못했던 혜경의 눈물을 닦아준다. 나는 그칠 수 없지만. 당신은 많이 울어봤으니까, 그치는 법도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에 섞인 슬픔을 갈무리 하지 않으며 말을 고른다.)
어쩌면, 당신이... 나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대로는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실컷 미워해도 돼. 버려도 돼.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하는 말은 꽤 가벼운 말투였다.)
(가득 고인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면 흘려 보내며 선명한 시야로 혜경을 보금 더 응시하다가 혜경의 손을 잡아준다.) ......돌아올게. 내 말은. 나는 널 떠나지 않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잡지 말고. 따라오지 말라는 소리이기도 해.
 
설석환:(혜경의 손을 놓고 노인의 집 밖으로 나간다.)
 
차혜경:미뤄하라니. 버려도 된다니. 그게 말이냐고. 그리고 눈물이라는 게, 이래서 문제다. 나는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 눈물과 안경의 왜곡에 심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고. 날 불안해하 하는 분위기도 조성하지 말고.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툭, 떨어진다. 몸이 멀어지긴 했어도 완전히 멀어지잔 의미는 아닌 것인지. 손을 잠시 붙잡아주었다. 이내 떨어지고 말았지만. 난, 그 온기만큼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라.)
(당신의 말 한 마디씩 사이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제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야.
가족은 가족을 지켜야만 하는 거잖아.
 
차혜경:기억 해. 이게 내 마음이라는 거?
(그리고 그 말처럼. 아니, 나는 당신보다 용기가 부족해서. 대문이 열렸다 닫히는 걸 보고도 따라가지 못 했다.)
……….
(그리고 침묵이었다.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의 첫 침묵이었다.)
 
석환이 떠나고 빈 거실에 당신 혼자 남겨집니다.
 
움직이는 시간 속에 당신만 굳어버린 채로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노인이 음식들을 가지고 나옵니다.
 
노인의 손에는 한가득 음식들이 들려있습니다.
 
싱싱한 과일까지 있네요.
 
노인: (심각한 공기가 느껴졌는지 어색해 하면서도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같이 온 분은 어디 가셨나?
 
차혜경:(거의 그쳐가는 눈물을 성급하게 닦는다.)
아, 그게, 그게……….
(입을 잠시 다물고 만다.) 돌아올 거예요. 꼭. 반드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 뿐이었다.)
(한편, 그가 경계심을 갖추라는 말은 그 사이에 잊고. 혜경은 그 상 앞에 와서 미안한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식량을 찾아주셨을 텐데. 좀, 죄송하네요.
 
노인: 일단 들어요. 밥부터 먹고. 식량도 조금 내어줄 테니까, 일행이 오면 같이 좀 가져가고요. 방도 빌려줄 테니까 오늘은 거기서 쉬고.
 
차혜경:(눈동자를 둥글게 돌린다.) 고맙습니다. 아니….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어르신도 먹고 살아야 할 건데. 저희가 너무…… 많은 배려를 받는 게 아닐 지.
(그러면서 어르신이 수저를 들기를 기다리는 눈을 하고 있다.) 걱정되네요.
(자신은 생각보다 뻔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인: 나야 뭐 혼자 사니까... 어차피 식량도 많고요. (수저를 들며 혜경을 향해 웃는다.) 방은 안쪽에 있는 방 쓰면 되고.
 
차혜경:(그제서야. 혜경이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럼 어르신은… 이 집에서 계속 혼자 사셨던 건가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요?
 
노인: 네, 뭐 그렇죠. (생글생글 웃으며 적당히 입에 음식을 넣는다.) 늘 혼자였던 건 아니지만, 결국 지금은 혼자네요.
 
차혜경:(노인보다는 천천히 식사를 한다. 듣고,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럼 저희에게 주신 안쪽 방은... 원래 누구의 방이었나요? 실례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지.
 
노인: 아, 그 방은 그저 손님 방이에요. 사용감은 없으니까, 편하게 써도 돼요.
 
차혜경:아, 손님 방이구나.
(맞장구를 적당하게 쳐준다. 그리고 몇 수저 들지 않은 식사를 끝마친다. 숫가락을 내려두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죠? 차려주신 게 너무 많아서... 죄송하게도 저 혼자 다 먹기에는 역시 무리인 것 같네요.
식사 끝날 때까지 기다려드릴까요?
 
노인: 아뇨, 괜찮아요. (부드러이 방을 가리킨다.) 안 기다려줘도 돼요. 아무래도 일행 분 몫까지 준비했더니 좀 많네요. 어차피 곧 돌아오신다고 했으니까, 식사는 제가 따로 정리해둘 테니, 먼저 쉬어도 좋아요.
 
차혜경:정말로 친절하신 분이시네요. (의도 없는 친절일 수 있지만. 이런 세상에 의도 없는 친절이 가능할까 싶다. 상황에 대한 몇 개의 예상과 대책을 다 세우고. 이 집 안을 더 알아보기 위해서 일어난다.)
잠시 방에서 짐만 풀고 올게요, 그럼.
아,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러니까. 제 이름은 차혜경 입니다. 차혜경.
 
노인: 그래요, 차혜경 씨.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차혜경:(그리고 노인이 묶으라고 했던 방으로 향하죠.)
 
노인이 제공해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의 말대로 사용하지 않는 손님 방인 듯 그저 침대 하나만 놓여있을 뿐입니다.
 
방에 별다른 물건들은 없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네요
 
늘 쨍쨍하던 낮의 태양이 아닌 노을이.
 
차혜경:(노을이라니. 꼭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짐이랄 것도 없겠지만.
 
풀겠다면 풀어보아도 좋습니다.
 
당신의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차혜경:(두 개의 가방을 벽에 내려둔다. 그리고 단순하게 짝이 없는 자신의 가방부터 풀어본다.)
(두 개의 수첩과 담배곽은 잘 있을까?)
 
두 개의 경찰수첩은 모서리가 조금 구겨진 것도 같지만 무사히 잘 들어 있습니다.
 
담배곽은 처음 주워들었을 때부터 그러했듯
 
차혜경:(설석환 경찰수첩 표지를 쿡 찌른다. 그의 이마 대신이다.)
 
잔뜩 찌그러져 있습니다.
 
차혜경:(담배곽은……. 고민하다가 이제 제 주인에게 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남자의 가방에 넣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의 가방 안을 본다. 뭐가 있을까?)
 
무기로 챙겨왔던 망치와 휴대용 라디오가 들어있습니다.
 
결국 이 무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쓸 일이 생기겠죠.
 
가지고 나갔다면 좋았을 텐데...
 
차혜경:(멀리 갔을까? 돌아온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돌아온다는 말이 없었다, 궁금하다. 어디에 가서 언제 돌아올 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린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종종 그러듯. 무언가 잡히는 신호가 있을까 싶어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방 안에 치직거리는 소리가 맴돕니다.
 
"국민 여러분 모두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차혜경:(사람의 목소리보다 기계의 목소리다. 같은 문구가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다. 혜경이는 눈을 감으면서, 그 소리를 몇 번 들었다.)
(그리고 이내 라디오를 껐다. 그리고 잊지 않고 담배곽마저 그이의 가방에 넣어두면, 이 곳에서 할 일은 완성이다!)
(혜경이는 벌떡 일어나서 손님방을 나간다. 할 일이 없으니,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식사 중이실까... 궁금해서.)
 
방 밖으로 나가면 별다른 인기척이 들리지 않습니다.
 
차혜경:응? 어르신? (여기저기 살펴본다.)
 
[욕실], [부엌], [노인의 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차혜경:(혹시 음식 같은 걸 정리하고 있을까 싶어…)
어르신, 정리하고 있으세요?
(부엌으로 먼저 향한다.)
 
부엌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한쪽 벽에는...
 
깜빡-
 
비어 있는 선반이...
 
깜빡-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잠이 쏟아집니다.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이 늘어지며 주저앉습니다.
 
차혜경:(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선 일단 주저 앉은 후에, 벽에 기대고……)
왜 이러지. 내 몸이……….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세상이 암전됩니다.
 
...
 
...
 
...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당신은 다시 눈을 뜹니다.
 
부엌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한쪽 벽에는 관리가 잘 된 날카로운 칼들이 걸려있고,
 
각종 주방 도구들이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눈을 감기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차혜경:(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비빈다. 잠이 와서 그러나.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좀 달랐는데.
(아니. 애초에 얼마나 자버린 거지. 나 그렇게 피곤했나?)
안 되겠다. 어르신에게 먼저 잔다고 말을 해놔야…….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킨다. 혹시 몸이 쓰러지거나 넘어지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그 몸으로 뒤뚱뒤뚱 걸어서 노인의 방으로 향한다.)
 
자고 있는 것인지 문이 닫혀있습니다.
 
차혜경:……. 설마?
(근처에 있는 창문을 바라본다. 그, 벌써 해가 졌나? 분명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해는 여전히 지평선에 걸려 있습니다.
 
아주 예쁘게요.
 
차혜경:역시 어르신이라서…. 일찍 주무시는 건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저녁 인사는 드리지 못 하겠고. 욕실로 향한다. 자려면 씻어야 할 거 아닌가.)
 
평범한 욕실입니다.
 
샤워기며 욕조, 세면대 모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차혜경:(혜경이는 세안을 하기 위해서 물을 틀었다가. 잠시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 곧 모종의 마음의 결정을 내립니다.
수건의 개수를 세고 충분하다는 걸 확인하면. 욕실을 잠급니다. 네! 욕조가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보면,
 
불행히도 물이 흘러나오지는 않습니다.
 
차혜경:(하려고 했습니다.)
(세면대를 꽉 쥐고) 아, 왜, 세상이 나를 방해하는 거야? 대체 왜?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정말로 지금은 저녁이 맞는 걸까요?
 
차혜경:(몇 번이고 세면대를 확인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런 현상을 우리 아지트에서도 확인한 적이 있던가?)
 
처음입니다.
 
우리는 늘 멈춰진 시간 속에서만 살아왔으니까요.
 
차혜경:(수사를 할 적의 습관처럼. 양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뭔가 불안한데.
(욕실을 나가서, 창문을 바라본다.)
(한, 30분 동안 바라본다.)
 
긴 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눈에 담은 아름다운 석양도 질려갈 때쯤에도
 
해는 변함없이 지평선에 걸려 있습니다.
 
예쁘게요.
 
차혜경:……….
지겹지 말라고 시간 조정을 해주셨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창조주시여?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리고 참으로 성급하게 노인의 방을 두드린다.)
살아 있어요? 아니, 안 멈춰 있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차혜경:……. (불안하다.)
(현관을 나선다. 노인이 있는 방의 창문이 보이는 곳으로 빙 돌아간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습니다만
 
어쩐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차혜경:(이상한 냄새? 어디서 나는 걸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방 안에서 나는 듯합니다.
 
차혜경:(무척이나 복잡한 눈이 됩니다. 마음도… 다급해집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노인의 방문을 열어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온갖 악취가 풍겨옵니다.
 
잠에 들기 전에도 이 집에서 이런 냄새가 났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맡아본 불쾌한 냄새,
 
그러니까 이건.
 
그래요.
 
차혜경:(사취.)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입니다.
 
아마 냄새의 근원지는 저 침대인 것 같군요.
 
차혜경:(천천히 다가간다. 긴장감은 있지만 두렵지는 않다.)
(망설임은 없이, 침대를 본다.)
 
침대의 이불을 들춰본다면
 
노인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신의 상태는 아주 끔찍합니다.
 
하반신이 끔찍하게 잘려나가
 
상반신만이 겨우 남아있습니다.
 
어쩐지 당신의 체감으로 좀 전까지 함께 했던 노인과
 
차혜경:(사취가 나야한다면 꽤 오랜 시간일텐데. 어째서?)
 
생김새도 묘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 이성 판정 ✷
 
차혜경:
SAN Roll
기준치: 22/11/4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차혜경:(시체를 봤다는 충격보다는. 그 인과 사이가 구별되지 않는 충격이 세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차혜경 이성 감소 - 2
 
설석환:차혜경! 어디에 있어?!
 
그때 방 밖에서 석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차혜경:(소리는 들리는데. 바로 대답하지 못 한다. 무릎을 꿇고, 절단된 신체 부위나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주 한 박자 늦게.)
설 경감, 어쩌지? 사건이야.
 
설석환:차혜경, 대답해!!
 
듣지 못한 것인지 근처의 방문을 모두 열어보는 소리가 들립니다.
 
차혜경:(저 사람도 흥분하면 사람의 목소리를 안 듣는 걸까.)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기억했다 싶으면. 혜경이는 일어나서 방 문으로 걸어간다.)
나, 여기에 있어! 그런데 들어오지는 말고. 내 말부터 들어 봐!
 
설석환:차혜경? (뒤늦게 들었는지 방 쪽으로 다급하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가고 싶어. 안전한 거 눈에 보여줘.
 
차혜경:당신, 원래 이렇게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니? 장해솔처럼 굴지 말고. 잠깐만.
여기……… 시체가 있으니까, 코 막고, 조심히 들어와.
(성급하게 들어와서 시체를 보고 놀라지 않도록. 하고 싶은 말을 다한 헤경은 문을 연다.)
 
설석환:하, (눈앞에 멀쩡한 혜경이 보이자 그대로 혜경을 제 품에 끌어안는다.) 차혜경.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안일하지 않게 조심한다며,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다 거짓말이야.
(잠시 숨을 고르고는 안으로 들어가 천으로 노인의 시체를 덮어버린다.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해. 강력계 짬이 몇 년인데, 대체 어느 쪽이 더 놀라겠는가.)
시간이 다시 멈췄어. 돌아갈 거면 지금 가야 해.
 
차혜경:(그 품에 끌어안아지면서 생각을 한다. 조심이라. 너무 이상한 말처럼 들렸다. 확실히 자신은 이 집 안에서 안일했다. 설마하니 시체를 볼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생각한다. 나는 대체 어떠한 이유로 살아있는 건지.)
(그러다가 다시 놓아지고, 그의 방식으로 노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싶을 때. 들려오는 말.
시간이 다시 멈췄어. 돌아갈 거면 지금 가야 해.
그에게 무엇이 더 우선 순위인지 알 것 같은 말.)
이, 죽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돌아가는 게 우선인 거야?
내가… 이 사람을 죽였을 지 모르잖아.
 
설석환:말이 되는 소리를 해, 차혜경. 네 눈에는 이게 죽은 지 하루이틀 된 사체로 보여? 그렇다면 형사 일 허투루한 거고.
 
차혜경:(아, 조금 화나는 말이다!)
 
설석환:(혜경의 손목을 세지 않게 붙잡고는 방 밖으로 데리고 나선다.)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이 집에서 식량도 좀 챙겨가는 게 좋겠어.
창고는 나 혼자 내려갈 테니까, 차혜경 당신은 위에서 잠깐만 기다릴래?
 
차혜경:(끌려서 방 밖을 나온다. 대체 저 노인은 왜 죽은 것이고. 며칠 지난 것처럼 부패되어 있는 지.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 한 난제가 많은데.)
(입을 꾹 다문다. 설석환이 왔잖아. 그가 왔잖아.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상대는 다름이 아닌 이 남자잖아.)
왜? 나도 같이 내려가. 물건 챙기는 것도 두 명이서 같이하면 더 좋을 거 아니야.
 
설석환:......한 가지만 물어볼게. 당신이 그랬지, 내가 유일한 가족이라고.
당신은 내 행동을 어디까지 눈 감을 수 있지?
 
차혜경:………. (갑자기 나온 말이 뭐 이래?)
우리 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행동이라면, 뭐든.
 
설석환:......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두 사람은 함께 창고로 향합니다.
 
어두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각보다 넓은 내부가 느껴집니다.
 
전기를 켤 수 없어 어둑한 창고에 눈이 익숙해지면
 
차혜경:이래서 그 노인이 창고를 그렇게 오래 있었나 봐.
 
선반마다 올려진 음식들과
 
구석 틈에 박혀 있는...
 
사람?
 
차혜경:(내 눈이 보고 있는 게 맞나. 사람이라니?)
 
설석환:(손가락을 튕겨 혜경의 시선을 제게로 돌린다.) 음식 챙기자.
 
차혜경:(이대로, 정말 이대로. 그냥 가는 게 맞을까. 혜경이는 설석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말이야. ………. 당신 이 곳에 시체가 있는 줄, 이미 알고 있었어?
 
설석환: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차혜경, 그냥...... 빨리 돌아가자. 집으로. 내가 너무 힘들어.
 
차혜경:……….
그래. 미안해. 당신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만 하지. 그래.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의 말처럼 식량 몇 개를 챙긴다. 생각보다 느린 손짓이다.)
 
설석환:응,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줘. 당신이라도.
(말을 끝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들고 온 가방에 식량을 쓸어 담는다. 말 없이 묵묵하게.)
 
차혜경:………. (그 모습을 본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사람이 너무 달라진 것 같다. 나에게…… 나란 사람을 별 달갑지 않게 대하던 사람이었는데.)
 
✷ 심리학 판정 ✷
 
차혜경:
심리학
기준치: 40/20/8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의 말처럼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함이 느껴집니다.
 
당신을 데리고 내려오기 싫어했던 게 느껴지듯
 
이 공간을 탐탁지 않아하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혜경:(결국은 자신은 내려온 보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다 챙겼어?
 
설석환:얼추. (혜경을 돌아보며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럼 가자.
(이내 등을 돌려 먼저 계단을 올라갑니다.)
 
차혜경:(그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뿐이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아서.)
알았어. 그런데 신발 끈만 묶고서.
(자신이 운동화를 신었는 지, 구두를 신었는 지, 단화를 신었는 지. 잘 기억도 안 나는 주제에 그런 말을 내뱉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기억하는 그 사람의 위치를 찾아 노려봅니다. 사람이라니. 분명, 이 집은 혼자 사는 곳이라고 했고…….)
 
✷ 관찰력 판정 ✷
 
차혜경: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그럼에도 어둠 속이라고. 그 남자만 바라보고 있던 눈인지라. 새로운 것을 망막에 그리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눈을 제대로 뜨고, 다시 바라본다.)
 
✷ 관찰력 판정 ✷
 
차혜경: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하얀 장발의 머리와
 
하얀색의 긴 수염
 
그리고 저 모자
 
차혜경:(보라색 볼캡.)
 
분명히 그 노인입니다.
 
인영의 발치에는 망치 하나가 떨어져 있습니다.
 
차혜경:(그러니까 말이다.)
(이건 그저 느낌이었다. 내가 이걸 들고 가야만 한다는 느낌. 혜경이는 그 망치를 손에 쥡니다. 그리고 자신이 챙긴 물건 사이에 숨겨요.)
(이래야만 한다고. 운명이 부르듯.)
 
당신은 망치를 챙기고
 
석환의 뒤를 따릅니다.
 
✷ 관찰력 판정 ✷
 
차혜경: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앞서 가는 남자의 소매가 붉은 것은 우연일까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노인이 안타깝긴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량을 챙겨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두 사람은 집을 나섭니다.
 
석양이 내린 거리가 붉습니다.
 
좀비들은 이전처럼 멈춰있고
 
바람도 새들도 구름도 모두
 
움직이는 것은 다시 우리뿐입니다.
 
차혜경:(걸음이 느리다. 아니, 몸이 무겁다. 물리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자꾸만 뒤쳐지고 만다. 그리고 이내 걸음을 잠시 멈춘다.) 힘들다.
 
설석환:(말 없이 혜경을 돌아보고는 자리에 멈춰선다.) 그래도 가야 돼. 언제 다시 시간이 흐를지 모르니까.
 
차혜경:그거 말고.
이렇게 속만 시끄러운 거, 너무 힘들다고. 차라리 울고 시원해지는 거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이건 울고 나면 더 무겁게 가라앉는 감정인 것 같거든.
왜 아까 그런 질문 한 거야?
어디까지 눈 감아 줄 수 있냐는 말,
 
설석환:......
우리 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행동이라면, 뭐든 눈을 감겠다고 했지. 그러면, 차혜경. 지금 눈 감아.
 
차혜경:(흔들린다. 마음이, 내 마음이 흔들린다. 왜 흔들리는 지 모르고, 아주 많이 흔들린다.)
눈, 감아줄게. (그리고 그 흔들림은 말이다. 이런 의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해버리는 마음에서 오는 가책.)
그러니까 다시 말 해 봐. 난 정말로 네 가족이고. 넌 정말로 가족을 위한 거지? 가족은, 힘들 때, 서로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설석환:가족... (입에 담는 게 버겁다. 간신히 멈춘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흐를 만큼. 그래도 대답해야. 그래야 하는데.)
차혜경, 너밖에 없어. 좋든 싫든 우리한테는 지금 우리밖에 없어. 나는 당신마저 잃으면 정말로 이 시간과 함께 멈춰버릴 것 같아. (그리고 그것만이 숨이 막히지 않게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다.)
 
차혜경:………. 그래.
차라리 그렇게 답 해.
이상한 질문하지 말고. 날 잃으면 무섭다고 말 해. (멀어진 거리를 좁힌다. 아직도 마음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를 지나서 한 걸음 앞을 먼저 나선다.)
당신의 입에서 정말 날 가족처럼 생각한다 말했다면. 진짜 배신감 느꼈을 거야. 거짓말인 거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난 진심이야. 정말로 진심이야. ………, 그러니까. 나도 당신 뿐이 없어. 가자. 내 집으로.
 
설석환:그래, 가자. 우리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쩐지 멀게만 느껴집니다.
 
차혜경:아, 그 말은 좀 기분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지. 그런 장난을 친다.)
 
석양을 등에 지고 걷는 이 길이.
 
설석환:(혜경의 장난에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인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언제 또 시간이 흐를지 모르니 이 석양도 오래 지속될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 근처에 도착하면
 
✷ 행운 판정 ✷
 
차혜경:
기준치: 40/20/8
굴림: 46
판정결과: 실패
 
이런, 당신의 가방에는 구멍이 뚫려있었습니다
 
차혜경:으응?
 
마음이 무거워 가방이 가벼워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도로 그 식량들을 주으러 가기에는 우리 둘은 많이 지쳤으니까요.
 
───────  ───────
 
무거운 가방만큼이나 무거운 몸을,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도착합니다.
 
당신의 자루가 뚫려 식량의 반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식량은 석환의 가방에 담아온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많이 힘든 날이었잖아요?
 
이렇게라도 자신을 위로하는 편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좋을 겁니다.
 
설석환:(집. 머무는 동안 사실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주 조금은. 한 커풀을 벗겨낼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거실에 가장을 내려두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차혜경:(짐을 정리하는 일이 제 몫이라는 것처럼 가방부터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제 가방에 구멍이 뚤린 걸 알고서, 매우 억울한 표정을 한다.) 너무하네. 정말! 집 나올 때 챙긴 소지품은 내가 주머니에 넣고 다녀서 다행이지….
(설석환과 조금 먼 거리에서 그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가방을 보수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고민한다.) 바늘… 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려나.
 
설석환:그래도, 반 정도는 남았네. (멍하니 제가 내려둔 가방에 두던 시선을 혜경에게 돌린다.) 줘 봐.
 
차혜경:(다른 때와 비교하면 조금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뭘 줘. 혹시 이 쓸모 없는 가방? (가방을 가볍게 흔들어본다.)
 
설석환:(가방을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가방.
 
차혜경:(이걸 왜 달라는 걸까 생각하면서, 발을 살살 끌어서 다가간다. 그리고 그에게 건넸다.) 뭐. 나 대신에 혼내줄려고? 가방을? (작은 웃음.)
 
설석환:(가방을 건네 받고 일어나 거실에 있던 서랍 두 번째 칸을 뒤진다. 그러니까 분명 이쯤에...)
(반짇고리를 하나 꺼내 도로 자리에 앉고는 바늘에 실을 꿴다. 바느질을 잘 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었지만, 뭐라도 할 거리가 생긴 것이 기꺼운 것에 가까웠다.)
손놀림
기준치: 10/5/2
굴림: 32
판정결과: 실패
 
차혜경:(그 모습을 말 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 세상이 이런 꼴이 되고서 차혜경은 침묵이란 걸 좀 배운 사람이기에.)
 
설석환:(바늘에 몇 번 손이 찔리고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묵묵히 하던 것을 계속한다. 보이는 대로 훌륭하지 않은 솜씨였지만.)
(그렇게 한참을 두면, 공그르기 따위 할 줄 몰라 엉망으로 듬성듬성 가방 위로 실들이 줄을 이으며 이어진 가방이 남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 얼만큼의 시간이 소요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볼품 없이 꿰맨 가방을 말없이 혜경에게 내민다.)
 
차혜경:(도로 건네지면서 말 한 마디 없다. 받아내는 손길은 줄 때의 손길과는 조금 달랐다. 똑같은 가방인데. 조금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다고 할까.)
(그의 손에서 제 손으로 옮겨진 가방을 바라본다. 똑같은 가방이 맞는데. 역시나 조금 더 오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야 만다.)
옆에서 보니까 엉성한 바느질이던데. 금방 뜯어지면 어쩌지?
 
설석환:글쎄, 그때는 버리고 새 가방을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차혜경:그래야겠지. 그런데 그건 좀 많이 아쉽겠다.
이만큼 좋은 가방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설석환:찾아보면, 더 좋은 가방도 많지 않을까.
지금은 그 가방 하나 뿐이라서 가장 좋아 보일 뿐인 거지. 실제로는 안 좋은 가방일 수도 있는 거니까.
 
차혜경: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게 있는 건 이 가방 뿐이잖아. 가지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뭐 해?
난 내가 가진 걸 사랑하길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내 가방이 당신 가방보다 더 좋다고 확신하고.
 
설석환:그럼, 더는 당신이 가진 게 아니게 되면. 그 가방의 가치는 떨어지나? 더는 사랑하지 않게 돼?
 
차혜경:(그 말에 습관처럼 입을 작게 내민다.)
암울한 답이 나올 게 뻔한 질문. 꼭 답 해야만 해?
 
설석환:그래, 그럼. 답하지 마.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다시 입을 다문다. 한 번 흘렀다가 멈춘 시간이라서 그런가. 흐르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너무 천천히 흘러서,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차혜경:……….
(답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당연하지. 당연히 그래야지. 여전히 가장 좋은 것은 기억하고, 여전히 가장 사랑하게 된다면 말이야.
(긴 침묵 끝에 늦은 대답을 이었다.)
살아갈 자신이 없거든. 나는 묻어두고 외면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 이런 방식으로는 죽어도 미래까지 생각하며 살 수 없다는 거 알아. 따지자면 나의 방식은 조금씩 현재를 연명할 뿐인 방식이겠지.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고 안을 수 있는 사람이 선택하는 방식이니까.
 
차혜경:마치 (예전의, 내가 기억하는) 당신의 방식처럼.
(대답을 하는 이유는…. 이번만큼은 단순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 확신에 가득차서, 옳다고 믿은 나의 것을 말이라는 형태로 내뱉기 좋아하는 나라고 하지만. 이것만큼은 왜 대답을 하고 있는 지, 설명하지 쉽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배려라도 배려니까. 받은 배려에 보답하고 싶어서? 글쎄…. 저 사람이 오랜만에 말을 걸고, 내가 곁에 잠시 앉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줬기에? 글쎄….)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입을 열게 만들 정도의 핵심은 아니다 싶다.)
내가 그래서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 어쩐지 우울한 분위기가 될 것 같다고….
(그래서 은근슬쩍. 네 탓이나 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설석환: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니까...
내 방식... (과거를 돌아보고 안을 수 있는 사람. 그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아니었다. 그때의 자신은 그 날. 떠올릴 수도 없는 날. 이미 죽었다, 그 아이 옆에서. 혼자서는 아무래도 외로울 테니.)
(멍하니 또 바닥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을 돌리려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서 나서기 전에 돌려두었던 모래시계로 향했다. 시간이 흘렀다는 걸 증명하듯 절반 정도 흘러있는 모래가 아래 쌓여있다.)
(어느 쪽으로 뒤집어도 절반의 모래임은 변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그것을 한 번 뒤집고는) 뭐라도, 먹을래?
 
차혜경:(똑같은 버릇. 같이 살면서 생긴 습관. 시간은 흐르지 않지만 누적은 되었다. 그를 따라서 일어난다.) 같이 골라도… 돼? 아무거나 말고. 대충 말고. 적당히 말고. 같이 골라도 돼?
 
설석환:(혜경의 말에 천천히 혜경을 돌아보고는 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같이 고르자.
 
시간이 다시 멈추었기 때문에
 
조리가 필요한 음식은 먹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평소와 달리 선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차혜경:(망가졌지만 다시 고쳐진 제 가방은 적당한 구석에 내려두고. 그 옆으로 총총 다가간다. 그의 가방을 멋대로 열고. 하나둘 꺼낸다.)
사실 나… 배는 고프지는 않아. 그 노인의 집에서 먹은 게 좀 있거든.
 
설석환:혜경아, 다음부터는 남이 주는 음식 함부로 먹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네 안일함은 너만 죽이는 게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래도 먹어. 같이.
 
차혜경:흠. (당신의 가방을 뒤지면서 이것저것 고르며 말을 한다.) 그러면 말이야. 이건 흔한 질문 중 하나인데.
앗. (그러던 중 가방 밑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무화과다. 계절과 딱 맞는 과일이다. 혜경이는 그것을 손에 쥐고서, 말을 한다.) 나, 당신도 믿지 말아야 해?
 
설석환:(잠시 고민하며 손을 멈춘다. 그리고 입이 열리면 다시 손이 움직인다.) 믿지 마.
(가방에서 적당해 보이는 통조림 하나를 꺼내고는 뚜껑을 연다.) 그래도, 늘 의심하고 경계할 수는 없으니까. 반만. 딱 남을 경계하는 거에 반절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까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한테.
 
차혜경:(무화과의 껍질을 살살 쓰다듬는다. 믿으라는 건지, 믿지 말라는 건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그 속을 제대로 말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생각하면서.)
그건 누가 그래? 나한테 당신이란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설석환:내가.
나는 지금 나 스스로도 나를 믿을 수 없는데. 당신에게 믿으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차혜경:왜? 난….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설석환:차혜경, 나는... 당신의 믿음에 보답을 해줄 수가 없어. 그 믿음을 언제고 배신해 버릴 것만 같아.
 
차혜경:방금 전의 당신은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은 거야?
당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니까.
 
설석환:그러니까, 믿지 마. 나를 믿으라고 할 수 있던 때는 과거고. 네가 알던 나도 그저 과거에 불과하니까. 그때의 나를 기준으로 지금의 나를 보지 마.
 
차혜경:하나만 묻자. 당신은 그때의 당신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석환:당신은 내가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차혜경:설석환 씨. 당신의 입으로 내게 그랬지. 당신을 믿지 말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만큼의 절반. 그 반절만큼만 믿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말이야. 그 반대편의 반절. (차혜경은 손에 쥔 무화과를 베어 물어, 그 단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무화과의 단면을 보면 알겠지만. 그리 자세히 볼 건 못 됐다. 사람의 심장처럼.)
당신을 믿어야만 하는 반절. 그 전부를 걸고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고.
…대답, 해줘도, 될까.
 
설석환:(아무래도 한 번 터진 눈물샘은 마를 생각이 없나 보다. 이제는 자신이 무슨 이유로 우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다. 혜경은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모르겠다.)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고, 길을 찾을 자신이 없었다. 설령 길을 찾는다고 해도 돌아가는 게 맞는 것일까. 그 아이를 마음에 밑바닥에 묻어둬야 할 텐데. 내려둬야 할 텐데. 어떻게 그래.)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는.
이건 당신의 그 절반의 믿음도 부정하는 걸까. (믿지 말라고 했지만, 당신의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또한 두렵다. 그런데도 그 믿음에 아무런 답을 줄 수가 없다.)
 
차혜경:어쩌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말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난 당신이 아니잖아. 난 당신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잖아. 당신 같은 답을 할 재주는 없어.
(혜경이는 남은 무화과를 바라보다가. 제 몫의 음식을 씹어 먹는다.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삼킨다.)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지. 내가 납득한다면, 배신은 아니겠지.
 
설석환:(떨리는 입술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 마디를 내뱉으면 뒷말이 자연스레 뒤를 따라 나온다.) ......그 아이에게 미안해서. 나 혼자만, 어떻게 멀쩡히 살아갈 수가 있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차혜경, 이 벌과 같은 삶이 너무 빨리 끝나서도. 내가 벌을 이겨내서도 안 되는 거잖아. 그거야말로 그 아이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그 모든 기억이 여전히 내게 머물고, 그 사랑이 여전한데, 그 모든 걸 어떻게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을까.
나는 이 모든 걸 두고 갈 수가 없어. 함께 갈 수가 없다면, 그냥 여기 고이고 싶어.
 
차혜경:그럼……….
일단 입에 뭘 좀 넣어. 배도 안 고픈 내가 과일 하나를 다 먹었어. 그런데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째 한 입도 먹질 않아?
내가…. 아침 먹기 싫다고 울던, 시연이 대하듯, 당신 대하는 걸 원하지 않겠지?
눈을 감으라고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애가 입을 벌리고 웃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숫가락을 넣어버리는 같은 행위 말이야.
걘, 내가 나랑 마지막으로 한 집에 살 때도 그런 투정을 부렸어.
 
설석환:당신은 어떻게, 입에 담을 수 있어? (혜경의 입을 통해 시연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오면 손에 들고 있던 통조림을 내려 놓는다.)
(그동안 입에 담지 않던 것은 자신 뿐은 아니었으니까. 의문, 놀라움, 어쩌면 경악.)
 
차혜경:너무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입에 담아서? 그래서 놀라는 거야?
제대로 정한 금기도 아니었잖아.
암묵적인 금기였지.
 
설석환:(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서 입에 담을 수도 없던 나날이었는데. 당신의 세상은 벌써 일어섰나 보다.)
아직 입에 담는 것은 커녕 생각조차 꺼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차혜경:정말.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구나? (당신이 내려둔 통조림. 주인을 잃은 그것을 빼앗듯이 쥔다.) 내가 분명 일단 먹으라고 했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내용물 한 개를 손으로 집는다.)
먹어.
 
설석환:혜경아. (혜경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젓는다.)
 
차혜경: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몰라도. 어떻게 살고 싶은 지는 말했잖아. 그냥 과거에 고이고 싶다면 그 신체만큼은 살아있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 놔. 일단 필요하지 않아 보여도, 원하지 않아도, 먹고, 자고, 깨고, 사는 습관. 과거에 머무르는 게, 쉬운 줄 알아?
먹어. (손목은 붙잡혔지만 밀려나지는 않았다. 꽤 강경하게 굴 것인지. 약간의 힘으로 밀어붙인다.)
 
설석환:못 먹겠어. 적어도 지금은. (약간의 힘에도 순순히 물러났지만, 혜경의 손에 자신에게 닿는 걸 허락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먹을게. 나중에.
 
차혜경:나중? 그건 정확하게 언제야? 다시 시간이 흐를 때면 되는 걸까?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리면 되는 거야?
알려 줘. 나한테, 좀.
 
설석환:왜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차혜경, 제발.
 
차혜경:당신 잊어버렸어? 나 원래 이렇게 집요한 사람이라는 걸?
 
설석환:평소에는 안 그랬잖아. 그냥 이런 건 내버려두면 안 돼?
 
차혜경:이젠,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으니까!
시간이 흐른 세상에서,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는 지 알게 됐으니까!
이 멈춘 세상에서는 게속 기다려주고 배려해주고. 그런 거 할 수 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든, 그 세상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을, 난 잊지 못 해.
당신을, 잘라내고, 버릴 수 없어.
내가 못 해. 그건, 정말, 그건 정말로.
 
차혜경:당신이 말한 것처럼. 내가 정말로 동경하고 존경했던, 경감님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나한테, 자신의 길도 비교할 수 없이 멋지다고, 말해주던 사람이 이렇게 된 거, 눈 감을 수 없어.
그건 우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고!
 
설석환:(잡고 있던 혜경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서 이러는 건데?
왜 나를 괴롭혀... 왜 나를 자꾸 끌어내려고 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차혜경:(그 힘에 몇 걸음 뒤로 밀려난다. 하지만 오뚝이마냥 그 자리 다시 서서 다가간다.)
당신이야말로! 난 단 하나 빼고 요구하지 않았잖아. 어떻게든 살아있을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사실은 알고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름아닌 내가 그러했으니까.)
과거에 계속 머물고 싶다며. 그런데 어떻게 해야만 그렇게 살아지는 모르잖아. 유경험자로서 알려주고 있을 뿐인데. 그게 대체 무슨 불만이실까?
설마 말이야. 고작 이런 말이 당신을 몰아붙이는 거야?
그러면 어디까지 갈 거야, 설석환? 그 끝에는 뭐가 있는데?
 
설석환:살아있잖아! 지금 네 앞에서 숨 쉬고 있잖아!
너 하나 때문에 계속 살고 있잖아!
차혜경이 살고 있으니까, 살아가고 있잖아.
이걸로는 안 돼? 이건 사는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사는 건데. 어? 말해 봐. 어떻게 해야 살아간다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거냐고!
 
차혜경:(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입술이 몇 번이고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지만 그 입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막혔나 싶을 때.)
나한테 말고!
나한테 산다는 인정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설석환, 당신 스스로에게 살아간다고 인정 받을 생각이나 해!
나 없다고 안 죽어. 나 없다고 죽지 않아.
당신 안에, 당신의 아내와 딸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 하나 없다고 죽을 눈을 할 사람이 아닐 거야.
 
차혜경:나 좀 그만 생각 해.
그 시간에 당신을 좀 생각 해.
제발.
 
설석환:듣기 싫어.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자리를 떠나지도, 혜경의 입을 막는 것도 아닌 바보 같이 자신의 귀를 막는 것을 택한다.)
내 생각을 하라고? 집어치워. 겨우, 겨우 당신 하나라도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이 이상은, 이 이상은. 내가 버겁다고.
 
차혜경:(귀를 막은 그 손을 내가 때어낼 수 있을까? 짧은 판단이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다른 수단을 쓰기로 했다.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왜 버거운 거겠어.
그 머리, 그 심장. 그 집에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
(다시 한 번 멀어졌다. 마치 영엉 떠나버릴 사람처럼 굴 생각이었다.)
그 곳에는 원래 마땅히 당신이 거주하고 있어야 할 자리라고. 내가 아니라. 버겁다면, 날 잠시 내려둬.
못 하겠다면. 내가 직접 나갈 거야.
 
설석환:(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린다.) ......나가겠다는 게 무슨 뜻이야?
 
차혜경:뻔한 말이고, 뻔한 상황이잖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형사 일 허투루한 거고.
 
설석환:차혜경. (멀어진 거리를 바로 좁힌다.)
혜경아, (혜경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러지 마. 그래선 안 돼.
우리 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행동이 아니야, 이건.
 
차혜경:지금 당신이 보이는 태도도. 그다리 우릴 지키는 행동은 아니라고 봐.
(혼란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외면한다.) 상식적으로. 날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의 곁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잖아.
지금처럼 시간이 멈춰 있어서 다행인 거지.
예측할 수 없는, 변칙이 가능한, 원래 시간에서 당신은 나 하나만 생각하다가, 당신 스스로를 더 잃어버리게 될 거야.
나는 그런 거 싫어. 원하지 않아. 나는 예전이고 지금이고, 살아있는 자가 마땅히 더 살기를 바라.
난 그런 사람이야.
 
설석환:내가 상관 없다고 해도... 듣지 않을 거지.
차혜경은 늘 그렇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거니까. 의견을 돌리는 행동 따위 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없다는 나를 두고 정말로 가버릴 수도 있겠지.
내가 살길 바라? (혜경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이 실린다.)
그럼 가면 안 돼. 그리고 이건, 협박이야.
 
차혜경:그것 참…. 유효한 값의 협박이네.
(아픔이 느껴졌다. 딱히 그가 잡은 손목이 아프다는 식의 연약한 소리는 아니었다. 말을 하는 그의 발성과 눈빛에서 아픔을 느꼈다는 말이다.
그래. 내가 그래서 당신과 함께 했던 지난 시간. 1년하고서 3일 동안 침묵과 배려로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낸 이유. 그것이 지금도 그렇다는 듯, 눈 앞에 재현이 되고 있었다.)
……….
미안해.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이다. 자신의 행동도, 당신에게 썩 좋지 않은 수단이었다는 것을 머리 속으로 인정하기도 전에 나온 말.)
정말 미안해. 괜찮아. 나 어디로 안 가. 말했잖아. 당신만 혼자 유일이겠어? 나도 당신이 유일해. 심지어 유일한 가족이잖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에겐 그렇잖아.
 
차혜경:(그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의 팔뚝 사이로 팔을 넣고, 몸을 둘러서 끌어안았다. 고개는 비스듬하게 뉘여서, 입이 막히지 않도록 했다.)
가족이 가족을 어떻게 버려. 그건 지금의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당신을 어떻게 버리고 가…….
 
설석환:(끌어안기는 혜경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양 팔로 혜경을 한가득 안으면서 길고 긴 숨을 뱉으며.) 혜경아, 나...
(안고 있으니 제 표정을 볼 수 없음에 안심하며,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오늘 사람을 죽였어.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둔 말 뒤로 아마도 보통의 자신이었다면 뱉지 않을 말들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내가 나를 생각하길 바라?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정말 확인을 받고 싶어서 묻는 것인지, 그저 혜경의 믿음을 떠 보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약해진 자의 헛소리인지 모를 물음이다.)
 
차혜경:(뭐라고 말을 할까. 알고 있었어. 침대 위에 놓인 시체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랐고, 창고에서 본 인상적인 모자캡이나, 당신의 미묘한 말과 행동들 그리고 선명한 붉은 자국. 그 모든 걸 보고서 하나의 결론을 내지 못 할 만큼 무능하다면. 그거야 말로, 형사 일을 허투로 한 걸테니까.)
당신의 말에 답하기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어.
나, 당신 얼굴 봐도 돼?
 
설석환: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당신의 답이 달라질까?
 
차혜경:아마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눈을 감은 채로 당신의 얼굴을 봐도 돼?
 
설석환:......내가 당신의 품에서야 겨우 입이 떨어진다면?
 
차혜경:그럼…. 더욱 더, 당신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설석환:그래, 그럼. (팔을 풀고 혜경을 놔준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가 허하다.)
 
차혜경:나 잠깐이지만 춤을 배운 적 있어가지고.
(자신을 놓아주고 떨어진 한 걸음. 혜경이는 곧바로 그 걸음을 쫓아갔다. 그리고 그 상대로 손을 설석환의 얼굴 위에 고스란히 가지런하게 올린다.)
미안해. 당신한테 그런 일이나 하게 만들어서. ……. 당신 탓이 아니야. 안심하고 방심하고 안일하게 굴었던 내 탓일 거야. 온전히 당신의 잘못으로 두지 않을 거야.
(그 상태로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세 개의 질문. 그 모든 것에 대단 답을 읊었다.)
괜찮아. 사람을 버리는 건, 내가 가장 못 하는 일이거든. 이건 당신만 알고 있어? 알았지?
 
설석환:(듣고 싶은 말이었나. 모르겠다. 원하는 답변이 있던 게 아닌 것 같다. 아마 더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 않다고 매도해주길 바랐을 지도 모른다. 망가진 이의 사고라는 건 그랬다.)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해주었으면 하다가도, 자신을 매도하고 밟아주길 원하기도 한다.)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가족으로 있겠다는 말에 묘한 답답함을 느낀다.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해주겠다는데. 붙잡고 협박했던 대로 옆에 있겠다는데, 참 웃긴 일이다.)
(어쩌면 계속해서 감정을 터뜨릴 기회를 찾고 있던 것은 아닐까. 앞에 있는 자신에게 져줄 것 같은 사람을 이용해서.)
내가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혜경이 제 살인을 알고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다. 그걸 감안하고 데리고 갔던 거니까. 묻지 않아서 초조했으며, 눈을 감아서 불안했다.)
(그리고 지금은... 무슨 감정인가.)
 
설석환:내가 그냥 아무나 되는 대로 죽인 거면 어쩌려고 잘못을 가져가겠다고 해.
 
차혜경:형사 생활, 죽은 사람만 보며 살아온 게 아닌 거 알잖아. 교만한 자, 비굴한 자, 외면하는 자 그리고 후회하는 자.
당신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렇게 달라진 설석환이란 사람을 모를 정도로 짧은 시간을 함께한 게 아니잖아, 우리.
(그 단단한 손이 당신의 입술을 지나친다. 나쁜 버릇은 없나보다. 짓이겨져서 피부가 망가지지는 않았네.)
당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아무나 되는 대로 죽였을 리 없다는 거지.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대한 응당한 벌을 받기를 원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여기는 재판소도 아니고, 난 검사도 판사도 아니지. 그런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당신이 조금이라도 죄에 있어서, 자신이 할 일에 대한 벌만 받게 하는 것.)
누굴 죽였어? 무슨 이유였어? 당신은 그때 어땠어? 내가 많이 떠올랐어?
 
설석환:나는... (응당한 벌을 받고 싶은가. 아니, 그 어떤 벌도 받고 싶지 않다. 지금 내게 내려진 형벌 외의 것은 아무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그렇게 굴기를 혜경은 원하는 것 같았으니.) 그래.
노인을. 아니, 노인인 척 하는 사람을. (말을 이으려 하면 속이 울렁인다. 토할 것 같아. 역시 이렇게는 말을 못하겠다. 이렇게 마주 보고서는.)
(한 손을 올려 혜경의 손을 붙잡는다.) 너를...
(구역질이 나 입을 틀어 막는다. 당장이라도 속을 비워내기라도 할 것처럼 올라오는 토기를 삼키며 말만을 뱉는다.)
너를 죽일 것 같아서.
네가 아주 많이 떠올랐지. (혜경만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으나, 혜경이 가득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차혜경:(중요한 것은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일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가 그것에 관여를 했다면.)
이런데 어떻게 당신의 죄라고만 말할 수 있겠어.
(짧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위아래로 쓸어준다. 진정하라고. 괜찮다고. 시체를 보고도 멀쩡할 것이라고 자신하던 사람이 이럴 정도면, 아주 심한 마음의 통각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잘못 일부를 가져갈게. 어차피 버겁잖아. 내가 바라는 건……. 하나고.
(당신이 사는 거.)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짧게 웃었다,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아까 전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을 떠나겠다고 하던 협박 말이다. 정말 나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설석환:(말없이 혜경을 응시한다.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 말의 무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무게와 같을까.)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차혜경:(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한다. 벽이나 탁상으로 몸을 바싹 붙인 여자는 굳은 얼굴을 하고 만다.) 뭐야?
 
설석환:......기다려. 내가 보고 올 테니까.
(문으로 다가가 현관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다.)
 
구멍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차혜경:…… (그 뒤에 있던 여자는 "뭐가 보여?" 라고 물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 깜짝 놀라서, 후다닥 거실로 가서 숨는다. 쇼파 뒤로.)
당신도! 빨리, 이리러 와!
 
설석환:(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문고리를 잡는다.)
 
차혜경:(소리없는 비명을 지른다.)
 
설석환:(걸려 있는 잠금 장치를 확인하고는 문을 조금 열어본다.)
 
문을 열면 어린 소녀가 서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녀는 근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인지 초췌해보입니다.
 
소녀는 겨우 입술을 달싹여 말을 건넵니다.
 
소녀: 혹시 먹을 것을 좀 나누어주실 수 있을까요?
 
차혜경:(그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설석환의 커다란 몸에 가려져 있다보니 말이다. 다만, 여리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야?
 
설석환:......
(여리고 어린 아이. 숨이 막힌다.)
 
소녀: 저어... 안 될까요
 
차혜경:설석환, 뭐냐니까? 누가 노크한 거야?
 
설석환:(문을 다시 닫고 잠금 장치를 풀고는 문을 연다. 그리고 한 발 옆으로 물러선다.)
 
차혜경:(막힌 것 없이 복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설석환이 본 것처럼 작은 소녀가 있었다.
아이, 사람, 살아있는.)
(벌떡 일어나서 소파 뒤에서 나온다. 종종 걸음은 너무 빠른 탓에 다리가 꼬일 뻔 했다.) 괜찮아? 석환 씨, 뭐해요? 일단 안으로 들여야 할 거 아니야. 얼굴부터 힘들어 보여. 물, 물, 물이 혹시 필요하니?
(그 남자 옆으로 다가갔을 때는, 그 긴 말을 다 내뱉은 후였다.)
 
소녀: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설석환:(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소녀를 안으로 들이며 급하게 문을 닫는다. 혹시라도 다시 시간이 흐르면 곤란하니까.)
어디서 왔어? 몇 살이야?
 
소녀: 저는 건너편에 사는데, 원래는 여기 좀비들이 엄청 많아서 못 들어오는데. 오늘은 다 어디 갔는지 비어 있어서요. 12살이에요!
 
차혜경:(그가 그런 걸 묻으면. 혜경이는 다시 안쪽으로 총총 움직여서 생수병 하나를 잦아가지고 왔다. 조그맣게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는 가뭄이 든 듯, 말라 있어서..)
12살.
(그 병을 쥐어주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고 발이 멈췄다.)
 
소녀: (고개를 기울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차혜경:……다른 어른들은 어디로 가고. 혼자 여기로 온 거야? (그래도 웃어야지. 어린 애가 지금 여기에 있잖아.)
(혜경이는 애써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면서. 생수병을 소녀에게 보였다.)
마실래?
 
소녀: 원래 아빠랑 같이 사는데... 아빠가 다리를 다치셔서. 아빠가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혼자 나가지 말랬는데, 제가 몰래 나왔어요. (생수병을 받아 들고 몇 모금을 삼킨다.) 너무 배가 고파서.
 
차혜경:(아빠라. 입 안이 묘하게 쓰다. 다리가 아프다는 것도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그렇구나. 그럼 아버지도 식사를 하셔야겠네.
석환 씨. ……, 오늘 우리가 가져온 거. 이 아이에게 주는 게 맞지 않겠어?
 
설석환:(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아빠'라는 단어가 가슴이 시리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있다면 그것이었을 텐데.)
(작은 가방을 찾아와 노인의 집에서 챙겨온 통조림을 넣고는 아이의 등에 매준다.) 아빠가, 걱정하시잖아. 돌아가면, 절대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아빠 말 잘 들어야지.
 
소녀: 치이... 아저씨도 우리 아빠처럼 잔소리가 많아요. 그치만... 감사합니다. (두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인사를 한다.)
 
차혜경:……. (그 말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마음이 좀처럼 쉽게 얌전해지지 않았다.)
그지? 아빠들이란 왜 저러는 지 모르겠다.
(혜경이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빠들이란. 정말 왜 그런 건지. 그래도 급한 게 아니라면 여기 다시 오면 안 돼. 정말 안 돼. 좀비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만약에 이 곳에 우리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계속 빙빙 돌기만 했을 거 아니겠니?
그건 정말 위험한 거니까.
널 위해서라도 그러지 마렴.
 
소녀: 네에... 그럼 저 빨리 가볼게요! 사실 아빠도 엄청엄청 배고플 거예요! 그나마 있던 것도 다 제가 먹어버려서... (민망한 듯 웃으며 문 앞으로 달려간다.)
 
차혜경:(손아귀 사이로 사라진 소녀. 혜경이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잡을 수 없었다. 잡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말이야.
너.
이름이 뭐야?
 
설석환:혼자서는 위험하잖아. 아저씨가 데려다 주면 안 될까.
 
차혜경:(하지만 이름 하나는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소녀: 저요? 이하윤이요!
그치만, 아빠가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 이거는 내가 온 거니까 다른가?
 
차혜경:(입꼬리만 씰룩거린다.)
그냥 모르는 아저씨 아니야.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자신의 것보다…. 아무튼 내 것보다 손에 익지 않는 무언가.)
이 아저씨는 경찰이야. 모르는 아저씨는 위험하지만. 경찰 아저씨는 무섭지 않지?
(설석환의 경찰 수첩이었다. 혜경이는 그것을 흔들었고. 설석환의 팔을 잡아 끌어다가, 그 손바닥 위에 얹어줬다.)
 
소녀: 와아 아저씨 경찰이에요? 대박! 그러면 경찰 아저씨는 따라가도 돼요! 좋아요!
 
석환은 아이 손이 깨지기라도 하는 유리인 것처럼
 
조심히 잡고는 현관문을 엽니다.
 
설석환:금방 다녀 올게.
 
차혜경:(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난.)
빨리 와.
(하고 말했고. 그것만 말하기에는 너무 무겁다 싶어서.)
…나한테 줄 선물도 사오고.
(그런 말이나 괜히 덧붙였다. 정말 괜히.)
 
그리고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차혜경:(닫힌 문. 혼자 남은 나.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뒤늦은 눈물이 쏟아졌다. 아, 어떡해. 그 남자가 저 밖으로 나가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이한테 별별 말을 다 했는데. 정작 나는 시연이가 생각나는 아이를 봤다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서 윤기를 떠올리는 말을 들었다고. 마음이 잠깐 무너진다. 정말 잠깐 무너질 뿐인 거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한 없이 치사한 것이니까.)
(그렇게 혜경이는 조금 울었다. 몸을 웅크리고. 아주 조금만.)
 
그렇게 두 사람을 기다리다 보니, 창 밖엔 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그새 또 시간이 흘렀나 보군요.
 
대체 시간이 언제 흐르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금방 온다더니.
 
기다림이 길어집니다.
 
차혜경:(모래 시계를 바라본다. 그가 돌려뒀던 모래시계를.)
 
짙은 어둠이 깔린 밤
 
늘 밝았기에 조명이 필요 없던 집도 어둠에 잠깁니다.
 
이래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혜경:(정말로 선물을 가지러 오기 위해서 늦는 건 아닐 것이다. 답은 하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혜경이는 한쪽으로 밀어뒀던 자신의 가방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 근처에 놔뒀을 물건을 바라본다. 가방에서 나온 잡다한 것들인데. 그것들 사이에서 망치가 있을까?)
 
✷ 행운 판정 ✷
 
차혜경:
기준치: 40/20/8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불행히도 망치도 오는 길에 잃어버린 듯 합니다.
 
지금도 시간이 흐르는 중이라면 조명이 켜질 겁니다.
 
불이라도 켜 볼까요?
 
너무 어두워서 집을 찾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차혜경:(망치를 찾기 위해서 뒤적였지만 마땅한 게 없다.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이 놈의 안경. 안경닦이도 없어서 고생이라니까.
(혜경이는 짧게 투정을 하고서, 전등 스위치를 눌러서 조명을 켜본다.)
 
깜빡
 
몇 번 깜빡거리더니
 
미약하지만 빛이 들어옵니다.
 
차혜경:(좋아! 다시 가방 근처로 가서 다시 한 번 찾아본다.)
 
✷ 행운 판정 ✷
 
차혜경:
기준치: 40/20/8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당신의 가방이 아닌
 
석환의 가방 근처에서 망치를 발견합니다.
 
차혜경:(조명이 들어오는 방이다. 어둡던 창고보다 망치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망치에는 혹시... ... ... .... 내려친 흔적이 그대로 있을까?)
 
✷ 관찰력 판정 ✷
 
차혜경: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망치는 깨끗합니다.
 
차혜경:(설마, 그 창고의 노인이 흉기로 가지고 간 걸까? 어떻게 죽였냐까지 듣지 못 했으니. 사건의 공백을 추론으로 채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사건이다. 지금 또 다른 사건인 실종 사건이 발생한 만큼 빠르게 행동을 해야하는 순간이다.)
(혜경이는 망치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고 자신도 그러듯. 모래 시계를 뒤집었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향한다. 설석환이 갔을, 저 건너편 너머로.)
 
문을 열고 나서면
 
갑자기 달려든 인영과 충돌합니다.
 
차혜경:아야!
 
설석환:차혜경? 왜 나왔어,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차혜경:(부딪힌 신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정말 아팠는 지, 오른쪽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 이게 뭐야! 아프잖아!
 
설석환:쉿. 조용히 해. 시간이 흐르는 중이잖아.
(혜경을 잡고는 재빠르게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를 들은 건지 1층에 다시 좀비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설석환:시간이 갑자기 다시 흘러서 늦었어. 나오면 어떡해,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차혜경:(그의 행동에 맞춰서 뒷걸음질을 쳐줬다. 그러던 중에 손에 망치를 놓치고 만 건…. 해프닝 정도로 치자.)
왜겠어! 내 행동이 이유를 당신이 다 말했잖아!
늦었다고.
 
설석환:최대한. 최대한 빨리 온 거야.
너무 어둡고, 좀비를 소리로밖에 들을 수가 없어서. (떨어지며 소리를 크게 울리는 망치를 무시했다. 어차피 지금은 안에 있으니까 괜찮았다.)
(혜경의 손을 붙잡고 현관에서 떨어져 안으로 들어간다.)
미안...
 
차혜경:…….
왜 갑자기 안 하던 사과를 해?
 
설석환:내 쉬운 사과를, 당신에게는 했던 적이 없던가.
 
차혜경:음, 적어도, 1년 동안은 말이야. 당신의 쉬운 사과를 듣기 보다, 무화과를 먹는 게 더 빠르긴 했지.
그런데. 그래서.
그 애는… 괜찮아?
 
설석환:괜찮아. 무사히 돌아갔어.
그 아이는, 그 아이라도.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어.
 
차혜경:그래. 그렇구나. 그거 참…….
(침묵.)
다행이다.
 
깜빡
 
깜빡
 
조명이 당장이라도 꺼질 듯 깜빡입니다.
 
차혜경:아, 시간이 흐른 것 같길래. 눈에 뭐가 보여야지? 불을 켰는데. 끄는 게 좋을까? 좀비가 혹시 눈이라도 떠서, 이 불빛을 보고 찾아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이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닌데.)
 
설석환:그래도 언제 다시 시간이 멈출 줄 모르는데. 계속 밤인 채로 멈추는 것도 곤란해.
전구든, 손전등이든. 뭐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갔다올게. 아마 윗층 어딘가 한 곳 정도는 열려있는 곳이 있겠지.
 
차혜경:(이번에는 그가 떠나기 전에 팔을 부여잡는다.)
난 언제까지 당신을 기다리기만 해?
 
설석환:그러면?
 
차혜경:적어도……. 고민은 해 줘. 당신만 움직이지 마. 내가 다녀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우리 둘이 움직이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일 수 있게.
그런 생각 해주면 안 돼?
 
설석환:당신이 다녀오는 건 방법이 아니야.
(마른 세수를 하며 거실에 있는 소파에 잠시 앉았다.)
아니면... 이대로 둘이 같이 어둠 속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 볼까.
 
차혜경:(조명에 불이 들어올 때만 그런 그의 모습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렇게 혼자 있는 모습이 어쩐지 보기 싫어서. 걸음을 옮겨서 그 옆에 선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당신의 허락 없이 앉는다. 속으로는 날 거부하고, 또 베란다로 가버리면 어쩌지… 싶지만.)
… 솔직하게. 지금까지 나온 제안 중에서 마지막이 가장 마음에 드네.
시간이라는 건 멈추는 게 아니라 흘러야 하는 법이니까.
시간이 멈춘다는 것에 당연해지지 말아야지.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아야지.
 
설석환:(여전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싫었다. 그 아이가 없는 삶이 멀쩡하게 흐르는 게 싫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지금은, 이 간만에 찾아온 어둠이 반가워서. 그 흐르는 어둠 속에 숨고만 싶었다.)
(옆에 앉은 혜경을 바라본다. 조명이 비치는 순간의 혜경에 어둠에 잠기는 순간의 차혜경을. 어둠이 완전히 이 방을 삼키면, 어쩌면 당신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러고 나면 나 또한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닐까.)
 
아래에서는 그르릉거리는 좀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아직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좀비라니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 속에 어둠은 깊어집니다.
 
차혜경:(그리고 사람의 몸은 시차에 따르는 법. 오랜만에 찾아온 밤. 긴장감과 함께 나른함이 찾아온다.)
(너무 많은 일을 경험한 하루다 생각하며. 눈꺼풀이 슬며시 감기는 듯 하다.)
 
설석환:(깜빡이는 조명 속 혜경의 눈동자도 무거워지는 듯하면, 자리에서 문단속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좀비들이 살아났으니, 이전에는 열어두었던 베란다와 현관을 잠그고, 모든 열린 창들을 잠근다.)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좀비 소리가 끊긴 것 같아. 다시 시간이 멈췄나 봐.
 
차혜경:그래? 잠은... 편안하게 잘 수 있겠다. (반쯤 꾸벅꾸벅 졸면서 말을 한다.)
 
설석환:들어가서 자. 옮겨줄까?
 
차혜경:그냥 (여기서 자면) ... 안 돼? (말하기도 귀찮은 것인지. 너무 웅얼거려서 문장의 반을 흘린다. 고개를 계속 까닥이는 것도 귀찮다고, 당신의 비어버린 자리로 몸을 풀썩 던진다.)
오늘 힘들었잖아 ... (잠이라도 그냥 맘 편하게 자자.)
 
설석환:(소파에 그대로 누워버린 혜경을 내려다 보다가 혜경의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그 위로 덮어준다.)
(그리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제 가방에 있던 라디오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한동안의 정적은 계속됩니다.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생기는 정적입니다.
 
마침내 긴 적막의 끝에 라디오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아, 안내...송입니다."
 
"현재... 늦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구조대가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차혜경:(그 소리가 자장가랄까. 그런 것처럼 들린다.)
 
그나마 아직까지 방송이 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인 걸까요.
 
아직 버려지지는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깊은 잠에 빠지는 동안
 
긴 정적과 좀비의 소리가 번갈아 들리며 시간은 더디게도 흘러갑니다.
 
석환은 그저 긴긴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당신의 곁을 지킵니다.
 
...
 
다음 날 아침
 
아니 아침일까요?
 
어둠 속에서 눈을 뜹니다.
 
너무도 어두워 눈을 뜬 것인지 아직 감고 있는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습니다.
 
차혜경:(가느다란 숨만 내쉰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탓이다. 눈을 뜬 곳이 익숙한 곳도 아니고. 나, 어쩌다가 여기서 잠들어서는.)
(그런 사고부터 천천히 로딩을 하고. 지난 밤을 생각한다. 창문을 바라보니, 아직도 밤인 모양이다.)
나는 노을이 지는 시간대가 좋은데 말이야.
(중얼중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여기서 잤으면? 설석환은 어디서 잤을까? ...싶어서.)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어보면,
 
석환의 손이 만져집니다.
 
아무래도 소파에 기댄 채로 겨우 잠든 모양새입니다.
 
그것도 보이지 않으니 하는 추측이지만요.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암흑 속에서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차혜경:아니. 이 사람은 멀쩡한 침대를 두고서.... (정말이지.)
(하지만 눈을 뜨고서 바로 그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너무 오래만에 느껴보는 감각.)
(혜경이는 어둠에 적응하려는 동안 그 손을 가볍게 쥐었다.)
 
이 어둠 속에서도 그의 손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합니다.
 
깊게 잠든 걸까요.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늘 그랬듯 깨워볼까요.
 
차혜경:(손등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내가 피곤한 만큼 이 사람도 피곤할 것이다. 조금 더 잠을 자게 하자고. 자신만 쇼파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본다.)
 
당신이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차혜경:(오늘은 뭔가 자는 얼굴이 천사 같달까. ...,진짜 얼굴을 보면 전혀 들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 그가 대견하다 싶어서. 허공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베란다의 문을 열지 않고, 창문으로 그 너머를 바라봅니다. 아니, 들어봅니다.)
 
✷ 듣기 판정 ✷
 
차혜경:
듣기
기준치: 80/40/16
굴림: 5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고요합니다.
 
아직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해요.
 
차혜경:내가 몇 시간을 잤는 지 모르겠네. (그 사이에 전등은 꺼진 모양이고.)
(어제 나온 이야기를 생각한다. 손전등 같은 게, 확실히 필요할 지 모르겠다. 이 남자는 절대로 날 혼자서 저 밖에 내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발가락 앞꿈치만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향한다.)
 
정말 나갈 거라면
 
✷ 은밀행동 판정 ✷
 
차혜경:
은밀행동
기준치: 40/20/8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은 석환 몰래 집을 빠져 나갑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당신이 집에 없다면
 
어떻게 될지 그 정도는 상상했길 바랍니다.
 
차혜경:(아, 깊, 깊 깊숙하게 잠든 거 확인했으니까! 그 정도 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
(혜경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올라서 위로 향합시다. 겸사겸사, 바닥에 떨어져 있을 망치도 주워서 가고요.)
 
어두운 밤
 
조명 하나 없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 은밀행동 판정 ✷
 
차혜경:
은밀행동
기준치: 40/20/8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쩅그랑-!
 
무언가 밟으면 안 될 걸 밟은 것 같습니다.
 
차혜경:(대체 왜?)
 
그래도, 아직 시간은 안 흐른 것 같죠?
 
차혜경:(이런 게 복도에 !!)
 
그 소리에 반응하는 좀비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 어서 빨리 물건을 찾아야겠습니다.
 
차혜경:(혜경이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걸음을 다시 옮깁니다.)
 
당신은 3층으로 올라옵니다.
 
3층에는 301-306호까지 늘어져 있습니다.
 
차혜경:(어디가 문이 열려있는 지 알 수 없으니까. 한 곳 한 곳, 손잡이를 잡아서 문을 열어봅니다.)
 
✷ 행운 판정 ✷
 
차혜경:
기준치: 40/20/8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멀리 갈 것도 없이 301호의 문이 열립니다.
 
차혜경:(설마? 어제 이어서 오늘도 럭키데이?)
(혜경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망치를 앞으로 치켜든 채.)
 
당신은 301호로 들어섭니다.
 
어두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인 점은 우리가 사는 집보다는 작다는 점이에요.
 
손전등은... 아무래도 서랍에 있겠죠.
 
방 한 켠에 서랍이 보입니다.
 
차혜경:(손으로 벽을 천천히 짚어가며 그곳으로 향합니다.)
 
총 3칸짜리 서랍입니다.
 
차혜경:(귀를 예민하게 세우고, 가장 아래부터 뒤적거립니다.)
 
텅텅 비어있습니다.
 
정말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차혜경:(보통 안 쓰는 물건을 아래에 두지 않나?)
(두번째 서랍을 열어본다.)
 
이것저것 많이 올려져있는 선반입니다.
 
아마 생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들이라 멀쩡히 남아있나 봅니다.
 
선반을 뒤지다보면, 과자 한박스와 도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혜경:(눈물을 글썽이면서 손전등 대신 그 두 개나 챙긴다.)
(그래도 도끼는... 유용하다 싶다.)
(그리고 과자. 맛있는 건, 언제나 사람을 희망차게 해준다.)
(3초간 짧게 희죽거리며 웃었다.)
(손전등을 찾기 위해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끄는 것도 그러니. 이 정도로 둘러보고 '나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앗, 그 전 에. 가장 마지막 윗칸도 봅니다 ^ ^)
 
첫번째 선반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정말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차혜경:(...)
(........)
(탁, 소리나게 닫습니다.)
 
과연 이 어두운 곳에서 본 게 다일까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차혜경:(일단 마음은 집으로 돌아가자 싶다. 하지만 갑자기 시작이 흐르기 시작해서, 이 집에 있던 좀비가 움직일 지도 모르는 일.)
(그런 일을 경계하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주변에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서랍을 다시 보도록 해요.
 
차혜경:(서... 랍... ... .... ...)
(서랍 맨 위를 본다. 서랍을 열지 않고. 그 맨 위. 올려두는 공간. 응.)
 
깨진 유리 조각이 하나 있습니다.
 
차혜경:(왜 이런 게 서랍 위에 있을까?)
(손에 쥔 모든 물건을 품에 가득 안고. 조심스럽게 유리 조각을 살펴본다. 도자기? 어항병?)
 
화병인 것 같습니다.
 
도둑이라도 들어서 깨버렸나 봐요.
 
차혜경:이미 털렸구나…….
(손전등을 찾기에는 301호는 아닌 것으로 한다. 어쩐지. 너무 문이 쉽게 열렸어.)
(오히려 손전등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좀 있다. 혜경이는 "넌 뭐 가진 것도 없냐? 빨리 더 내 놔!" 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서랍을 다시 들여다 본다.)
 
몇 번째 칸?
 
차혜경:(두 번째!)
 
두 번째 칸은 아까 본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도끼와 과자를 챙긴 것을 빼면요.
 
차혜경:(세 번째. 세 번째 서랍을 봐봅니다.)
 
텅텅 비어있습니다.
 
정말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관찰력 판정 ✷
 
차혜경: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손전등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혜경:(어디선가 나타난 손전등을 본다. 스위치를 켜본다.)
 
다행히 고장난 것은 아닌지 전구에서 아주 밝게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차혜경:(눈물은 나오지 않고. 마음이 슬퍼지네.)
 
이제 손전등도 찾았으니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 늦게 들어가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릅니다.
 
차혜경:(손전등이 추가되면서. 이것저것 물건을 제대로 안아들고. 301호의 집을 조심스럽게 나가기로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고.)
 
당신은 조심히 2층으로 내려가
 
집 앞에 도착합니다.
 
✷ 은밀행동 판정 ✷
 
차혜경:
은밀행동
기준치: 40/20/8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문을 열고 들어서며 당신은 기껏 찾은 손전등과 과자를 떨어뜨립니다.
 
조금 요란한 소리가 나고.
 
설석환:...차혜경?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면 본래라면 소파에서 느껴져야 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빠르게 몸을 일으킨다. 어둑한 시야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다.)
 
차혜경:(부산스러운 움직임이 흐릿하게 보인다. 말을 하지 말까 싶어도. 어차피 일어난 사람에게 뭘 숨기냐고.)
(바닥에 떨어진 과자와 손전등을 챙긴다. 그리고 손전등으로 불빛을 비춘다. 바닥을 향해서,)
나, 여기에 있어.
 
설석환:(바닥에 생긴 동그란 빛의 원을 보며 고개를 든다.) 집에 손전등이 있었어?
 
차혜경:음, …어떨 것 같아?
 
설석환:(모처럼 푹 잤는지 아직은 멍한 머리를 잡고 눈을 깜빡인다. 천천히 혜경을 향해 다가가며 잠긴 목소리로) 무슨 대답이 그래.
있었으니까 손전등 켠 거 아니야?
 
차혜경:(정말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데. 진실을 말하는 게 맞을까 싶다. 하지만…. 그도 자신에게 싫은 일에 관해서마저 이야기 해줬는데. 나라고 혼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는 건.)
(좀 많이 비겁하다 싶다.)
(혜경이는 과자와 손전등을 손에 쥔 상태로, 그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안긴다. 자신을 받아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 당신만 치사하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 너무하니까. 나도 혼날 게 뻔한 상황 속에서 얼굴이라고 회피하려고 한다.)
...잠깐 다녀왔어. 3층에.
그리고 거기서 주어왔어.
 
설석환:(자신이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
우리 둘이 움직이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며.
그런데도 굳이 혼자 다녀오길 선택했네.
 
차혜경:(이럴 줄 알았다.)
 
설석환:내가 일어났을 때 차혜경이 없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내가 잠 든 틈을 타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너를 구하러 갈 수도 없게 말하지도 않고?
 
차혜경:아,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나쁜 의도는 없었어. 제발, 제발, 제발. 정말이야.
(절대 얼굴은 보지 않겠다는 의지로 그를 꽉 끌어안는다. 실제로 얼굴을 보기가 무섭다.)
그냥. 잠든 모습을 보니까 깨우기가 싫었어. 그리고 할 일도 없고, 어둑한 방을 보니까 손전등이 없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아주 잠깐 다녀온 거야.
그리거 봐.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 이제 당신도 좀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나 그래도 다른 의미로 당신과 생존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숨기만 할 필요가 없을 지 몰라. 당신 옆에서, 늘…
 
설석환:(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사고를 점검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안, 먼저 일어난 감정이 요동친다.)
이제는 잠든 나를 깨우는 것조차 싫었던 건 아니고? 지겨웠던 거잖아.
(축 쳐진 팔을 올릴 생각도 없다. 안긴 혜경을 그저 내버려둔 채로 멍하니 어둠 속 한 곳을 응시한다.)
나 그동안 그렇게까지 당신 숨긴 적 없잖아. 당신을 눈에 보이게 챙긴 적도 없잖아. 나는 그저 방임했고, 방관했고, 당신은 내 눈치를 봤지.
근데 왜, 이제 와서. 새 쓸모를 찾으려고 그래?
내가 당신을 숨기겠다고 마음 먹고 난 후에, 왜 내 등 뒤에 숨지 않으려고 해?
 
설석환:숨어줄 수 있잖아. 왜... 그러지 않는 건데.
 
차혜경:………. 그러면 더 좋아할 줄 알았으니까. 그러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난 당신한테 쓸모가 있는 존재잖아'하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이 정한, 그 쓸모가 다 하면.
(나도, 나도 말이야.)
버려지는 거 싫으니까.
그래서 숨고 싶지 않았어. 인정 받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하는 거야. 난, 나는…….
(그래.)
 
설석환:차혜경, 나는 당신의 쓸모 때문에 당신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 당신의 생존이 지금의 내 목적이니까, 목적이 쓸모를 찾다가 사라지면. 그때는 아무것도 없잖아, 정말 아무것도.
내 인정 따위를 받으려고 하지 마. 그리고 적어도 이전의 나라면, 네가 그런 무모함을 감수하는 걸 도리어 자격 미달이라고 했을 테니까.
(품에 안긴 혜경을 떼어낸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사고 체계가 마음의 입을 막고. 기억을 들추면, 화제 전환이다.)
...뭐라도 먹을래?
 
차혜경:(괴로운 표정을 한다. 무모하다고 하면 당신이 하던 모든 행동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무모한 건, 늘 무모했던 건, 당신도 똑같으면서.
입 안에서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괴로운 마음이 참지 못 하고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사람이 너무 꽉 막혔어. 먼저 먹어. 난 짐부터 잠깐 정리할 테니까. (떼어내졌다고 하지만. 그 동시에 몇 걸음 뒤로 갔다. 거부고 거절이었으나 굳이 티를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라 당신을 기준으로 빙 돌아서, 거실 안 쪽으로 들어간다.)
 
설석환:그래, 그럼.
(거실 한 켠에서 어젯밤 아이에게 주고 치워둔 음식 중 적당한 걸 주워들어 입에 넣는다. 기계적 행위를 하듯 넘어가지 않는 음식물을 삼킨다.)
(어둠이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포근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숨이 막히기도 했다.)
있잖아, 우리.
나갈래?
 
차혜경:(짐이라고 해봤자 몇 개 없으면서, 여자는 느리게 짐을 치우고 정리하고 괜히 한 번 더 만지작거렸다.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은 고요와 시끄러움. 침묵의 시끄러움 사이로 날아들어온 말에 새침하게 대답하게 된다.)
말의 앞뒤가 안 맞잖아. 나의 생존이 당신의 목적이라면서. 나가면 위험하다고 말리던 사람이 누구더라?
 
설석환:답답해서.
나 혼자 움직이는 건 당신이 싫어하고. 당신이 혼자 움직이는 건 내가 죽을 만큼 싫으니까.
당신이 내 곁에 붙어 있겠다고만 약속하면, 당신 말대로. 우리 둘이 움직이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일 수 있겠지.
 
차혜경:(손을 멈추고 저 사람을 바라본다. 어떤 마음으로 위험을 감수하려는 건지,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묻고 싶었다.)
충동이야? 아니면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설석환:(생각이라는 걸 다시 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완전한,) 충동.
 
차혜경:(이마를 부여잡는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은 분명 없는데. 나는 머리가 한참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충동이라고 인정하면 어떡해. 충동이나 감이라는 영역은 남을 설득할 때 유효한 근거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당신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나한테 늘 충고했으니까.
 
설석환:설득이 아니야. 그냥... 뱉은 거지. 당신이 거절하면 나가지 않을게.
 
차혜경:……….. (나는 어떻게하고 싶은 걸까. 이곳이 안전할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걸까.)
그 충동은…. 타협이야?
 
설석환:글쎄, 잘 모르겠다. (베란다의 문을 열지는 않고 그저 그 앞에 서서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린 바깥을 내다본다.)
(완전한 흐름도, 완전한 멈춤도 아닌 세상에서 나는 어느 속도로 움직이면 되는 걸까. 멈춰있던 세상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시간에 맞게 고여있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뒤쳐지고, 나아가고. 그 모든 게 의지력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했다.)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꼭꼭 잠가두었던 문을 연다. 베란다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면 혜경이 잡으려 할 것 같아서.)
 
차혜경:(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다. 그의 마음의 벽이 잠깐 깨져서 눈물을 보였을 때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단 두 마디의 말에 마음이 와르르, 와장창, 무너지고 만다.
자신의 눈은 저기에 있는 그이보다 암순응이 된 눈이었다. 어둠 속에서 유독 짙은 물체감을 가진 남자를 향해 재빠르게 걸어간다. 그리고 통조림따위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부여잡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정확하게는 그 앞까지 와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 미안해. 미안해. 당신을 재촉하려는 건 아니었어. 당신을 어딘가로 밀어버리려는 게 아니었어. 미안해. 괜찮아. 당신이…, 설석환, 네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 또 다시 계속 기다릴테니까.
여길 나가지 않더라도 당신 곁에 붙어 있을테니까. 나한테 억지로 맞출 필요 없어.
 
설석환:(제 손을 붙잡고 그 앞에 주저 앉은 혜경을 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혜경의 한 쪽 뺨을 제 손으로 감싼다.) 혜경아, 왜 그래. 왜 그런 소리를 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사과하지 마.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잘못이 없었어. 내가, 다 잘못했지.
나한테 억지로 맞출 필요 없어, 당신이야말로. 내가 계속 맞추길 강요하고, 당신을 억압하는 거잖아.
 
차혜경:(그래도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제 뺨에 올라오는 손 하나 신경쓰지 않고, 그이의 눈을 바라본다. 눈을 찾으려고 한다. 눈은 마음의 창문이란 말이 있으니까.)
당신은 참을 수 없지만. 당신은 조금만 더 무거워져도 버거워하겠지만. 난 아니잖아. 난 더 참으라고 말한다면 참을 수 있고. 조금 더 무거워도 견딜 수 있고.
내가 더 잘 할 수 있으니까.
제발, 제발, 부탁인데. 당신을 포기하지 말아 줘. 날 맞춘다고, 당신이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다는 듯 말하지 말아 줘.
 
설석환:당신은 나보다 멀쩡하니까. 당신은 망가지면 안 되잖아.
(혜경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살아있는 온기를.)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러면, 나가지 말자.
(혜경의 머리칼을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전히 낮게 앉아있는 혜경에게 손을 내민다. 잡으라는 듯.)
 
차혜경:(그때만 시선이 움직였다. 당신의 눈에서 당신의 손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어. 꽉 잡아 줘.
(그래도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무릎을 꿇는 걸. 허리를 굽히는 걸. 가능한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라. 그 손을 흔쾌히 붙잡는다.)
 
설석환:(제 손을 잡은 혜경을 힘을 줘 일으켜 세운다.)
 
차혜경:(그 힘에 천천히 일어난다. 한 번 삐끗하긴 했다.)
 
설석환:그럼, 기다리자. 구조대든, 시간이든.
 
이젠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정말 기다리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지루한 기다림만이요.
 
차혜경:조용히 곁에 있을게. 그럼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거겠지?
 
설석환:(혜경을 일으키며 잡았던 손을 그대로 잡아 이끌며, 소파에 가 앉는다. 옆에 앉으라는 듯 손을 두어 번 당긴다.)
 
차혜경:(명백한 개인 공간 침범이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고요한 세계에서는 그 정도의 움직임도 소음이 되었다.)
 
설석환:기대도 돼?
 
차혜경:목이 아플텐데? 어디 한 번 해 봐. (한 번 기대보라고. 좁은 어깨를 툭툭 친다.)
 
설석환:(혜경과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아예 몸을 눕히듯이 기댄다. 알고 있다. 혜경에게 기대기에 자신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래도, 지금은.)
 
차혜경:(잠깐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편해? 아…. 아까보다 더 불편하다고? 그럼 다시 얼굴 좀 들어 봐. 아까처럼 맞춰줄테니까.)
(그런 이야기를 몇 번 주고 받고. 불편한데 그나마 편한 자세를 찾았다.)
눈 감아도 돼. 낮이면 깨어있으라고 할 텐데. 멈춘 시간이 밤이라서 자지 말라고 하기에 이상하거든.
 
설석환:(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 말에 눈을 감는다. 그렇게 계속 하염없이 눈을 감는다.)
 
정말 둘은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시간이 멈춰있다는 것입니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그렇게 차근차근 지루함을 죽여가고 있으면
 
어디선가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납니다.
 
✷ 듣기 판정 ✷
 
차혜경:
듣기
기준치: 80/40/16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창문이 깨지는 소리입니다.
 
소리의 근원지로 보아하니 아마 욕실의 창문인 것 같습니다.
 
차혜경:(익숙한 소리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근원지가 꽤 가까운 걸 듣고. 설석환을 바라본다.)
 
설석환:(감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빠르게 욕실을 향해 다가가 문을 연다.)
 
차혜경:(저, 저 남자는... ... ... 표범인가?)
(잠깐 헛된 생각을 하나 하고. 정신을 차린 여자가 그 뒤를 따른다. 그러보니 3층에 도둑이 든 것 같던데. 이 집에도.... 도둑 같은 게 들려는 것인가?)
 
욕실의 문을 열면 그대로 검은 인영이 뛰어나와
 
당신을 지나쳐 방 안에 있던 가방을 들고는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립니다.
 
정말 순식간에요.
 
차혜경:(진짜다. 그 보다 뒤를 따르던 혜경이다. 붙잡으려는 시도는 할 수 없나?)
 
당신은 붙잡지 못합니다.
 
남기고 간 흔적을 확인할 수는 있겠죠.
 
차혜경:(허우적, 허우적, 손에 닿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
 
설석환:(도둑이 사라진 베란다를 바라보며 주먹을 쥔다. 어떻게 해야, 조용히 아무 일 없을 수 있는 걸까. 왜 세상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내가 무엇을 해야 가만히 지나갈 수 있을까.)
 
석환의 뒤로 욕실의 창문이 깨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 옆에는
 
창문을 깬 도구로 보이는 망치가 놓여있습니다.
 
설석환:(몸을 움직여 베란다 쪽으로 가 도둑이 남긴 흔적을 찾는다.)
 
차혜경:(베란다로 넘어가서 도둑을 향해 씩씩거리고 있다.)
 
설석환:
추적
기준치: 50/25/10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차혜경: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 온 거야!
(그렇다. 이 많은 집 중 어떻게 사람이 있을 법한 집을 찾아 한 번에 깨고 온 걸까. 참 신기한 일이다.)
 
도둑이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이 발자국을 따라갈 건가요?
 
차혜경:(설석환은 그 정보를 나에게 알려줄까요?)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차혜경:설 경감! (옆으로 다가온 남자를 향해 눈에 불을 켜며 말한다.) 사건이야!
해결하러 가야지!
 
노인에게 얻어왔던 식량은 이미 도둑들이 가져가고 난 후 입니다.
 
제 이 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네요.
 
도둑을 쫓아 식량을 되찾아오는 게 좋겠죠?
 
설석환:발자국이 남아있어. 따라가면 잡을 수 있겠지. (혜경을 바라본다. 따라가야 한다면, 당신은 남았으면 좋겠다. 혜경이 원할 말이 이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차혜경:같이 갈 거지? (석환을 바라본다. 따라가야 한다면, 당연히 자신도 함께 하기를 바란다. 나도 알아. 당신이 원할 말이 이런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덧붙인다.)
당신 앞에서 죽지 않을게.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한, 40년은 유효한 약속이야.
 
도둑을 쫓을 건가요?
 
차혜경:(설석환이 함께 한다면.)
 
설석환:그 약속, 정말 지킬 수 있어? 나가지 않는 선택지도 있잖아, 차혜경.
 
차혜경:믿음이라는 건.
주는 쪽에서 생각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런 느낌이 든다. 만약, 우리갸 이야기를 통해서 나가지 않는다는 선택지에 머무르겠다고 하더라도. 이 말을 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
증명해 보일게.
당신이 선택한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당신이 보는 눈 앞에서 증명해보일게.
그리고 그런 결말을 향하는 과정이 어떻든. 당신과 함게 할게. 이제 서로 다른 길을 목표하고 걷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차혜경:증명할게. 그게 당신의 다정한 심장에 혼자 남아버린 나의 몫일테니까.
지킬 수 있어, 약속.
 
설석환:나는 모르겠어, 차혜경. 어떤 선택이 옳고 어떤 방향이 너를, 우리를 살릴 수 있을지. 왜 세상은 나와 너를 위해주지 않는지.
(왜 내 심장에는 당신만이 홀로 남았을까. 어째서 당신 하나 뿐일까. 그 누구도 그걸 원하진 않았을 텐데. 내 심장에 홀로 남아버린 당신과, 그 어느 자리도 원하지 않는 내가.)
그래, 당신을 믿어볼게. 차혜경을 믿을게. 당신 말을 따를게.
 
차혜경:(쫓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데 있지.
…, 당신은 이런 날 정말로 싫어하겠지? 늘, 정말, 미안.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베란다를 떠난다. 미쳤다고 도둑처럼 베란다를 뛰어내릴 바보는 아니다. 운동 솜씨도 좋지 않은 걸 아는데... 내가 뭐라고 뛰어내라나.)
 
설석환:(나는 차혜경을 싫어하나. 지금은 가슴속에 울분이 가득 차서 당신을 향한 진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어서. 답은 알려줄 수가 없다.)
사과하지 마.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대답하지 않는다. 어차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맞춰 하는 답변을 혜경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혜경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욕실에 떨어진 망치와 혜경이 주워온 도끼를 집어들고. 그것을 혜경의 한 손에 쥐어주면서.)
(망치를 쥔 제 손이 썩 달갑지 않았다. 비어있는 손을 잡고 싶었지만 한 쪽 손이 묶인다는 건 제약이라는 거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너를 지켜.
 
차혜경:(무기를 챙겨주는 모습에) 당신이 순경 역할을 자처하는 거야? (이런 말이나 한다. 혜경은 손에 쥔 도끼의 무게를 가늠하고. 현관문을 연다.)
(문을 나서기 전에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하지. 난 원래 일순위를 나로 정해둔 사람이야.
(그리고 흔적을 따라간다.)
 
두 사람은 조심히 아파트를 빠져나옵니다.
 
걸음을 조금 옮기자마자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됩니다.
 
나서기로 한 당신들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요.
 
수많은 좀비들이 당신들을 향해 쏟아집니다.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이요.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좀비들의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이 보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일출은 퍽 아름다웠습니다.
 
이 뒤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저, 마지막에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석환이 당신을 제 품에 넣었던 것을 끝으로 생각이 점멸합니다.
 
───────  ───────
 
 
드디어 기억이 들었나요?
 
그래요, 당신이 꿈 혹은 상상 속에서 보았던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떻던가요.
 
행복하던가요, 슬프던가요, 희망차던가요, 절망스럽던가요.
 
그 이야기가 어쨌든 그건 규린 당신이 떠올린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이 떠올린 그 이야기를 수정하던 수정하지 않던 모두 당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신이 멈춰놓았던 그들의 시간을 돌려주세요.
 
그 기억을 잊어버리기 전 당신의 소설을 완성시켜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에 제목을 붙여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공동 창작자가 있잖아요?
 
THE END.
 
ENDING 0.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는 제목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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